몸‘에 대해서’가 아니라 몸 자체를 쓴다고 해두자. 육체성이 아니라 몸을, 몸에 관한 기호나 이미지, 또는 수치가 아니라 그저 몸 자체를 말이다. 이것은 과거 한때 근대성이 관심을 기울였던,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고 해야 할 기획이다. 〔……〕
쓰는 것은 끝과 접촉하는 것. 그럼 어떻게 하면 글쓰기가 몸의 기호가 되거나 몸이 기호가 되도록 만드는 대신, 몸과 접촉할 수 있는가? 몸에는 어떤 것을 써넣을 수 없으므로 애초에 접촉은 불가능하다고 대답하거나, 몸짓으로 흉내 내는 방식을 통해 몸을 글쓰기 자체에 결합시켜버리면 된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 둘은 모두 성급한 대답이다. 우리에게 달리 대답할 도리가 없는 건지도 모르나, 어쨌든 이러한 대답은 신속하고 적절하되 불충분하다. 둘 다 결국엔 몸을 기호화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직접적으로, 다른 하나는 간접적으로, 그리고 하나는 부재로서, 다른 하나는 현존으로서. 그러나 쓴다는 것은 기호화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렇게 물었다. 어떻게 몸과 접촉할 것인가? 이 ‘어떻게’라는 문제에 마치 기술 차원의 질문에 응하듯 대답하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가 반드시 짚고 가야 할 사항이 있다면 그것은 몸에 가 닿는 것, 몸을 건드리는 것, 결국 접촉 그 자체는 글쓰기 안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실존의 본질은 전혀 본질을 갖지 않는 데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이 발생하도록 하는 것이 몸이다. 몸에 관한 존재론이 실은 존재론 그 자체인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존재는 현상에 앞서거나 현상 밑에 암묵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몸은 실존의 존재이다. 죽음을 이보다 더 진지하게 받아들일 길이 있을까? 마찬가지로 어떻게 하면 실존이 죽음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곧 실존의 몸이라는 얘기를 (이 둘은 아주 다르다) 설득력 있게 할 수 있을까? ‘죽음 자체’가 하나의 본질로 존재해서 우리가 그쪽을 향하는 것이 아니다. 몸이 있다. 그리고 아무런 본질을 (심지어 ‘죽음’마저도) 지니지 않은 채 다만 바깥을 향해 있는 실존이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기입하는 몸의 치명적인 벌어짐이 있다.
몸은 살아 있는 내내 또한 죽은 몸, 망자의 몸이다. 이 ‘나는 살아 있다’라는 망자의 몸이다. 죽었건 살았건, 죽지 않았건 살지도 않았건, 나는 열림으로, 무덤으로, 입으로, 무덤 속의 입 또는 입 속의 무덤으로 있다.
엄밀히 말해 우리는 기호 작용을 하는 몸에 대해서만 알 수 있고, 오직 그것만의 개념을 떠올리거나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몸이 여기 있다는 사실 여부, 또는 그것이 어떤 자리의 여기이거나 저기라는 사실은 거의 중요하지 않다. 반대로 우리에게 중요한 몸은 무엇보다도 의미의 대리인이자 보좌관으로서 작동하는 몸이다. 우리는 다른 몸?‘의미의 몸’?의 표상이란 강박 때문에 경련 상태에 도달한 전면적 히스테리의 몸 아니면, 그 나머지인 여기 뻗어 있는 ‘몸,’ 간단히 말해 상실된 몸만을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기호 작용의 경련은 몸으로부터 몸 전체를 빼앗고, 그 대신 동굴 속의 시체를 남긴다.
때때로 이 ‘몸’은 그 자체가 표상이 형성되거나 투사되는 (감각, 인지, 영상, 기억, 관념, 의식) ‘안’이기도 하다. 그럴 때 ‘안’은 몸에게 생소한 것으로, 달리 말해 ‘정신’으로 나타난다.(스스로를 그런 것으로 나타낸다.) 그런가 하면 때때로 몸은 기호 작용을 하는 ‘바깥’이기도 하다(방향 측정 및 조준술에서 말하는 ‘영점,’ 각종 관계의 발원지이자 수신기, 무의식). 이 경우 ‘바깥’은 두터운 내부로, 의향성으로 가득차고 메워진 동굴로 나타난다. 따라서 기호 작용을 하는 몸은 안과 바깥을 교환하고 확장된 것을 유일한 기호의 오르가논 속에 (의미는 거기서 형성되며, 그로부터 형태를 취한다) 폐기해버리는 과정을 끊임없이 되풀이한다. 특정한 철학적 관점들 또한 여기서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영혼’ 대 ‘몸’의 이원주의든 ‘살’의 일원주의든 혹은 몸의 문화적, 정신분석학적 상징체계 연구든 언제나 몸을 의미를 향한 송환으로 구조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화육을 탈육화의 구조로 만드는 것이다.
기탈은 오직 글쓰기에 의해서만 일어난다. 그러나 기탈된 것은 또 다른 경계로, 그러니까 기입이 하나의 경계 위에서 기호로 작용하면서 집요하고도 끊임없이 저 자신의 또 다른-고유 경계라고 지시하는 또 다른 경계로 남는다. 이렇게 해서 글쓰기 전체에 대해 몸은 또 다른-고유 경계를 이룬다. 하나의 몸은 (또는 하나 이상의 몸은, 또는 매스는, 또는 하나 이상의 매스는) 따라서 남겨진 흔적인 동시에 작도이자 궤적이기도 하다. (여기를 보라, 읽으라, 포착하라, 이것은 진정 나의 몸이니……) 글쓰기 일체에 대해 몸은 문자인 동시에 또한 결코 그렇지 않기도 하다. 달리 표현하면 그것은 일체의 문학성보다 더 아득하고 더 많이 해체되어 더 이상 읽을 수 없는 ‘문형성’이다. 글쓰기에 관련된, 그리고 분명 그것에 고유한 것이면서도 읽을 수 없는 것, 그것이 몸이다.
몸, 즉 사유는 자기 자신을 보여주는 존재, ‘자기-자신의-지시소’로서의 존재, ‘자기를-가리키는-자기의-검지’로서의 존재다. 존재에 의해 발화되는 ‘이것은 있다,’ 그것이 바로 사유다. 하지만 존재가 어떻게 발화한단 말인가? 존재는 말하지 않는데. 존재는 기호 작용이라는 비육체성의 영역으로 흘러나오지 않는데. 존재는 그냥 거기 있을 뿐인데. ‘거기’의 ‘자리-임’이고 몸일 뿐인데. 따라서 사유가 유발하는 문제는, 몸이 어떻게 발화하는가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점은, 모든 종류의 가치화, 위계화, 평가의 제스처(그와 같은 거대한 전통이 몸의 종속, 몸의 굴종, 심지어 몸의 비천성을 이끌어냈지요) 바깥에, 그 모든 가치 찬탈의 징표들 너머로, 있는 그대로의 몸, 즉 ‘자기를 느끼는 것’으로서의 몸 안에 실은 바깥으로 향하는 구조가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몸에 대해 말하면서 마치 어떤 타자를 대하듯, 어떤 무한히 타자인 타자, 무한히 바깥인 타자를 대하듯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몸을 거부하거나 배척해서도 안 되겠지만, 그것을 영혼의 자격으로 소생시키거나 재합병해서도 안 된다는 뜻입니다.
프로이트 사후에 공개된 그의 주 하나를 따르면, 영혼은 펼쳐지는 것이되 그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확장되는 것으로서의 영혼은 막상 저 자신이 확장되는 것을 알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확장된 것은 알아야 할 것이 아니라 일으키고 바깥을 향해 움직여야 할 것이다. 하나인 동시에 둘, 하나 속의 둘이자 둘 속의 하나라는 복잡한 방식으로 일어나는 일치의 정동이나 노출에서 스스로 알려지는 것은 비-지식이다. 자아의 이 알지-못함이야말로 자아를 형성하고 감각을 동요시킬 뿐만 아니라 감각으로 하여금 (여기에는 앎 그 자체의 감각마저 포함된다) 영혼으로부터 몸 전체를 향해, 나아가 세계의 끝을 향해 노출되는 하나의 정동이 되도록 만든다.
몸은 세계의 말단부까지, 그리고 자아의 끝까지 도달하는 영혼의 신장, 몸과 서로 얽히어 비분별적인 방식으로 분별되는 가운데 끊어질 듯 긴장하며 펼쳐지는 영혼의 확장이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