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켓 개발과 우주개발이 꿈이었고, 이에 관한 한 세계 최고를 자부하던 폰 브라운 팀에게는 포트 블리스의 생활은 견디기 어려운 고문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겪으며 폰 브라운은 엘파소의 생활을 “우리는 평화의 포로prisoners of peace다”고 한마디로 표현했다. 미국은 독일 로켓 팀의 코어 그룹과 V-2 로켓 100기를 조립할 수 있는 부품을 확보했으면서도 이것들을 사용해 새로운 로켓이나 탄도탄을 개발하려는 움직임은 전혀 없었다. (중략) 미국 정부의 이러한 무관심은 아마도 폰 브라운으로 하여금 필생의 소원이었던 달 탐사계획을 성취하게 만들어준 운명의 배려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만약 폰 브라운 팀이 ICBM 개발 같은 극비 프로젝트에 관련되었더라면 아마도 그에게 아폴로 계획을 구상하고 달로켓 ‘새턴Saturn-V’를 개발할 기회는 없었을 것이다. 달 탐사계획 자체도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아폴로 계획Apollo Program’과는 많이 다르게 전개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 p.64
1958년 대통령 선거유세에서 ‘존 F. 케네디John F. Kennedy’는 소련에 대한 아이젠하워 정부의 미사일 군사력 열세를 꼬집기 위해 처음으로 ‘미사일 갭’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사실 미사일 갭은 미 ‘대통령과학자문위원회President’s Science Advisory Committee’ 산하의 ‘안보자원 패널Security Resources Panel’이 작성한 ?핵시대의 억지수단과 생존Deterrence & Survival in the Nuclear Age?이라는 보고서에서 구소련은 ICBM 기술과 전력에서 미국을 이미 능가했다고 기술한 데서 비롯됐다고 본다. (중략) 이 보고서의 소련 ICBM에 대한 과대평가와 스푸트니크 위성이 상승효과를 일으키면서 공포의 미사일 갭을 일으켰다. 그러나 실상은 그 반대였다. 사실 OKB-1의 코롤레프 팀은 RV 개발이 지연되어 R-7은 1960년 1월이 되어서야 실전 배치될 수 있었던 반면, 미국은 소련보다 이른 1959년 9월 3기의 아틀라스-D를 반덴버그 공군기지의 지상 발사대에 배치할 수 있었다. 아이젠하워 정부는 ‘미사일 갭’이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지만, 언론과 시민 및 정치권의 불안을 막을 수는 없었다.--- p. 79
전략적인 필요에 따라 발사에서 탄착점까지 비행시간을 미리 정해놓고 표적을 조준해야 할 경우도 있다. 실제로 영국의 유일한 핵 억지력이었던 폴라리스 A3T ‘셰벌린Chevaline’은 모스크바의 ABMAnti-Ballistic Missile Defense을 돌파하는 시스템으로 설계되었다. SSBN에서 탑재한 16기의 셰벌린은 모두 모스크바를 겨냥하고 발사하도록 전략을 세웠다. 그러나 16발을 모두 발사하는 데는 몇 분의 시간이 소요된다. 따라서 최대사거리궤도를 이용한 통상적인 방법으로 16기를 발사한다면, 첫 기가 모스크바에 도달한 후 몇 분이 경과해야 16번째 미사일이 모스크바 상공에 도달하게 된다. 반면, 16기의 셰벌린을 조금씩 다른 궤도로 발사하여 동시에 모스크바로 도달하게 발사한다면, 모스크바의 방공망에 32기의 RV를 한꺼번에 요격해야 하는 부담을 줌으로써 셰벌린 탄두의 생존율이 대폭 향상되게 했다.--- p. 129
주어진 탄도탄으로 가장 먼 표적을 공격할 수 있는 ‘최대사거리궤도maximum range trajectory’는 매우 현실적인 궤도다. ‘최소에너지궤도(MET)’는 주어진 사거리를 비행하는 최소 운동에너지를 가진 궤도를 의미한다. 하지만 단위질량당 운동에너지는 이므로 최소 에너지는 최소 속력을 의미하므로 MET는 주어진 사거리를 가장 낮은 속력으로 갈 수 있는 궤도인 동시에 주어진 속력으로 가장 멀리 갈 수 있는 궤도라는 뜻도 된다. 이러한 이유로 최소에너지궤도는 최대사거리궤도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MET는 근거리 사격에도 항상 사용할 수 있으므로 MET를 최대사거리궤도라 부르면 혼란이 올 수도 있다.(중략) 따라서 추진제가 소진될 때 가장 멀리 가는 궤도는 MET이고, 이때 사거리가 그 탄도탄의 ‘최대사거리maximum range’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가까운 표적을 MET로 사격한다고 그 사거리가 최대사거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p. 161
CMP(대군사 핵능력CMP: counter military potential)는 핵전력을 비교하기 위해 사용하는 몇 가지 파라미터 중의 하나다. 위력은 kt로, CEP(원형공산오차circle of error probable)는 m로 잰다. CMP는 여러 가지 종류로 구성된 핵전력의 전체 효과를 표적의 특성과 무관하게 따져볼 수 있게 하는 물리량으로 CEP에 아주 민감하다. 구소련은 Y(yield, 폭발력) 값이 큰 탄두들을 많이 비축한 반면, 미국은 Y 값은 비교적 작지만 CEP가 구소련 것보다 훨씬 작기 때문에 CMP 전력상으로는 미국이 오히려 구소련보다 훨씬 강력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구소련 탄도탄의 CEP가 급격히 향상되고 탄두 수도 증가하여 미?소의 CMP 전력은 평형 또는 구소련의 우위로 돌아섰음을 알 수 있다. --- p. 314
일반적으로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장거리 재래식 탄도탄은 대도시에 대한 무차별 공격으로 심리적인 공포를 유발하는 테러 무기로서의 목적은 달성하겠지만, 전쟁의 향방을 바꿀 수는 없는 아주 값비싼 무기다. 이와 같은 이유로 군사적으로 위협적인 재래식 탄도탄의 사거리는 200~500km로 제한되는 것이 보통이고, 사거리가 1000~3000km인 재래식 탄도탄은 종말유도를 하지 않는 한 그 자체로는 군사적인 의미가 그리 크지 않다. 사거리가 3000km 이상의 재래식 탄도탄은 핵탄도탄으로 가기 위한 중간단계로 보는 것이 타당하며, 우리가 예외로 여지를 남겨둔 특수한 경우란 CEP가 1~10m 내외의 초정밀 탄도탄을 가리킨다. 과거에는 꿈도 못 꾸었지만, 과학기술의 발전은 사거리 10,000km, CEP가 10m인 탄도탄이 현실로 다가왔다. --- p. 337
냉전이 한창이던 1980년대 말 미국은 거의 8000여 발, 구소련은 10000여 발의 전략탄두를 보유하고 있었다. 구소련이 2000여 발이나 더 많은 전략탄두를 가지고 있었지만, 어떤 방식으로 미국에 선제공격을 감행하든지 상관없이 수천 발의 미국 SLBM이 살아남을 것이 확실했고, 그 반대로 미국이 선제공격을 가한다 해도 살아남은 구소련의 미사일로 미국을 폐허로 만들 수 있는 것이 확실했다. 100번의 초토화焦土化나 단 한 번의 초토화나 결과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현재 미국과 러시아 모두 1550발 남짓한 전략탄두를 배치하고 있지만 BOTbalance of terror가 작동하는 것은 1980년대 말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미국과 러시아는 지금까지도 BOT를 잘 유지하고 있다. 역설적이지만, 미국과 러시아 및 중국의 관계는 “탄두가 살아야 사람도 산다”는 말이 맞다.
--- p. 3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