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앞에 홀로 서 있었던 그들은 당연하게도 개인적인 기도를 그리스도교 영성의 긍정적이고도 본질적인 요소이며 모든 금욕적 실천의 필연적인 월계관이라 여겼다.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선교, 가르침, 선행 등의 모든 사역과, 심지어는 규칙적인 성사 생활조차 포기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오직 기도뿐이었고 이 기도만이 삶의 유일한 목표가 되었다. 그들은 이 기도를 통해서 세례의 열매를 맺고자 했고 기도 안에서 하느님을 알고자 했다.(본문 23쪽)
니싸의 그레고리오스와 고백자 막시모스는 모두 신플라톤주의 철학의 형식으로 그리스도교 영성의 근본적인 요소들을 표현하는 데 성공했던 그리스도교 신비 영성의 위대한 계보에 속한다. 여기서 이 두 위대한 교부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은, 동방 그리스도교 안에서 신화 교리를 말한 사람이 이 둘뿐이어서가 아니라, 영성과 순수 사변의 교차로에 서 있던 이 두사람이 후대 비잔틴 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본문 50쪽)
이집트에서 성 안토니오스 이래로 동방의 수많은 금욕 수도승에 의해 실천된 은수도 전통은 ‘완전’을 향한 길을 감에 있어서 수도승에게 전적인 자유를 허용한다. 게다가 은수도승 혹은 헤지카스트들은 ‘수도승’이라 는 말의 어원적이고도 원초적인 의미로 볼 때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수도승’이라고 자처했다. 비록 순결은 분명 그들에게도 영성의 본질적인 요소로 남아 있었지만 그들은 순종과 청빈 서약에 대해서는 회수도승들과 다르게 이해했다.
절대적인 영적 스승은 수도원장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자유롭게 선택한 경험 많은 수도승이며, 물질적 소유도 공동체에 헌납하는 것이 아니라 - 공동체는 종종 지나치게 부유했고 그래서 수도승에게 편한 삶, 때로는 지나치게 안락한 삶을 보장해 줄 수도 있었기에 - 그야말로 철저하게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본문 98쪽)
이렇게 팔라마스의 사상은 헬레니즘의 정신주의적 경향이 항상 멸시해 오던 물질을 복권시킨다. 그는 ‘영’(πνε?μα), ‘영혼’(ψυχ?), ‘몸’(σ?μα), ‘육’(σ?ρξ)과 같은 신약성경 용어의 고유한 의미를 재발견한다. 이 용어들은 결코 영적인 것을 물질과 대립시키지 않는다. 그것들은 오직 초자연적인 것과 창조된 세계를 대립시킬 뿐이다.(본문 145쪽)
선하심은 하느님의 한 부분이 아니다. 지혜도, 위엄도, 섭리도 하느님의 한 부분이 아니다. 하느님 전체가 선하심이시고, 지혜이시고 섭리이시고, 위엄이시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유일한 분이시기에 나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에네르기아 각각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시고 이 에네르기아 각각을 통한 현존과 행위를 통해서 단일하고 단순하고 나뉠 수 없는 방식으로 자기 자신 전체를 드러내시기 때문이다. (본문 161쪽)
원로(스타레츠)의 눈에는 원로원 의원이건, 빈농이건, 학생이 건 한결같이 다 영적인 치유를 필요로 하는 환자로 보였다. 어떤 이들은 자기 딸이나 아들을 결혼시켜야 할지,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할지, 일을 찾기 위해 이사를 해야 할지를 그에게 묻기도 했다. 한 농민은 자기 칠면조를 어떻게 키우면 좋을지 조언해 달라고 조르기도 했고 …. 결국 그는 해답을 얻어 갔다. 그를 가까이 모시는 사람들이 이를 보고 크게 놀라자 스타레츠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의 인생 전체가 그 칠면조에 달려 있습니다. (본문 208쪽)
오직 복음만이 그럴 수 있으므로, 우리 시대가 제기한 모든 문제에 대해 답을 내놓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헤지카스트 영성은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성경적 개념에 충실했다는 점에 서, 또한 하나의 유일무이한 현실인 육화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에 중심을 둔, 철저하게 단순해진 그 신심의 특징으로 인해서 놀라운 시사성을 얻는다. 이렇게 동방 정교회에서 영속적으로 이어져 내려온 헤지카스트 전통은 어떤 영성 학파의 절대화가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삶 전체에 필요한 ‘단 한 가지 가’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질문과 해답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본문 2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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