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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소리가 길고양이처럼 지나간다

빗소리가 길고양이처럼 지나간다

천년의 시-096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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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9년 03월 08일
쪽수, 무게, 크기 148쪽 | 230g | 129*209*20mm
ISBN13 9788960214194
ISBN10 8960214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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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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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렸다
빗소리는 도둑고양이처럼 지나갔다

귀퉁이가 떨어져 나간 몸뚱어리는 그물 같은 곰팡이 옷을 입고
민트빛 이마에 새겨졌던 이름은 해독할 수 없는 상형문자로 남았다
얇디얇은 갈비 짝마다 낡아빠진 활자들은 전설에 잠겨있다
누군가 꾹꾹 눌러쓴 펜 자국들은
여태 숨 죽여 기어 다니는 벌레들의 연명

지금은 하루의 어디쯤일까
나에겐 시간이 멈춰버린 지 오래다
내가 정설이었던 신선한 기억만이
솜안개 의식 속에서 깜박거린다

신문명에 도살당한 것도
노쇠한 정객으로 유배된 것도 아니다
잊혀지기 싫어 몸서리치는 늙은 여자는 더더욱 아니다

살아서 나간다면
추억을 찾아온 사람들을 위한 진열장에서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싶다
오래된 타자기와
백 년 전쯤 인물의 전기 옆이면 좋겠다
그들의 손가락에 닳아 남은 형체는
나에 대한 기억을 놓지 않을 것이다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난다
나는 눈을 감고
민트빛 꽃 속에
가물거리는 의식을 맡긴다
---「폐서적」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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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우 시인은 시각적 이미지의 변용에 매우 탁월하여 그녀의 전공이 혹시 그림이나 사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녀는 현대의 불연속적 세계에서 죽음 속의 삶, 삶 속의 죽음을 시각적인 이미지로 변용하는 데 능숙하며 그런 맥락에서 모더니스트적 경향을 보인다.
전통적인 서정시와는 달리 LA의 서연우 시인은 감정 유출의 센티멘탈리즘에 거의 빠지지 않으며 정교한 시각적 이미지들을 활용하여 현대 세계의 불모성과 마비, 세계와의 불화, 단절, 삶 속의 죽음, 죽음 속의 삶을 그려 낸다. 여성적 삶과 일상 속에서 죽음과 허무를 포착하는 묘사도 섬세하며 기본 정조情調인 멜랑콜리와 더불어 무채색의 배경 이미지들이 절망적이고 막막한 현대성을 드러낸다.
마치 흐릿한 감광판처럼 어둠 속에서 빛을 포착하기 위한 노력과 인내의 시간을 가지지만 감광판에 빛이 스며들 듯이 그녀의 시는 빛에 대해서 노래한다. 황폐한 무채색의 세계 속에서 채색의 빛을 찾아 헤매는 것, 그것을 절제된 언어와 반투명한 이미지, 적절한 비유, 조용한 어조로 노래하는 것이 그녀의 시 세계라고 하겠다.
빛이 떠오르기를 기다리며 스스로 밝아지고 있는 감광판이 있는 반투명의 시.
- 김승희 (시인, 서강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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