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에서 하루가 없어진다면, 무엇을 놓치게 되는 걸까.
보름간의 스페인 일정의 첫날, 콘수에그라에 가려는 내 하루가 없어졌다. 시차가 있다는 걸 생각하지 않고, 여행 첫날 그곳에 가려는 멍청한 계획을 세웠던 거다. 콘수에그라는 돈키호테가 괴물인줄 알고 공격했던 풍차가 있는 마을이다. 이천 페이지에 달하는 『돈키호테』를 읽어 내고는, 가보고 싶었던 도시였다. 그런데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루가 날아가 버렸다. 결국 그곳에 가지 못했고, 여행 둘째 날로 계획했던 톨레도로 곧바로 갈 수밖에 없었다. 많이 아쉬웠지만, 톨레도부터 시작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나 스스로를 위로했다. 『돈키호테』를 읽는 일은 사실 톨레도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돈키호테』에서, 세르반테스는 톨레도 거리를 거닐다가 아랍어로 된 『돈키호테 데 라만차 이야기』라는 원고를 주웠다고 밝히고 있다. 그 원고를 무어인에게 스페인어로 번역하게 해서 저자 세르반테스가 이야기를 전하게 되었다는 상황 설정이다. 내가 쓴 이야기가 아니니까 아무리 황당해도 나더러 뭐라고 하지 말라는 작가의 넉살이기도 하다. 그러고는 미친 기사 돈키호테를 통해서, 삶이란 유쾌한 혼란의 춤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17세기 초에 쓰인 『돈키호테』가 오랜 세월을 두고 사랑을 받으며 거듭거듭 읽히는 이유는 바로 그 미친 열정에 있을 거다. 또한 그 미친 열정이 보여주는 삶에 대한 사랑을 우리 모두 가슴 깊이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러하니 콘수에그라에서 미친 기사 돈키호테를 만나는 하루가 없어진다면, 삶이란 유쾌한 혼란의 춤이라는 하루분의 미친 열정을 놓친 셈이었다. 삶에 대한 하루분의 사랑을 놓친 셈이었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다면 누가 제정신일 수 있겠소?”라고 미친 기사 돈키호테는 말했다. 대지의 삶은 언제 어디에서도 풍요롭고 평안하지만은 않으니, 우리에게는 삶을 사랑하려는 미친 열정이 필요한 모양이다. 『돈키호테』의 여정이 시작되는 톨레도의 역사 역시 전혀 평탄하지 않았다. 톨레도는 기원전 로마의 식민지였다가 그 후 오랜 세월 동안 서고트족과 무어족의 지배를 받던 지역이다. 무엇보다도, 20세기 스페인 내전 당시에 치열한 격전지였다. 두 달이 넘는 전투에서 프랑코 반란군이 승리함으로써, 험난한 독재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까마득히 올려다보아야 하는 성벽 위에 자리 잡은 톨레도는 굳건한 요새이면서도 특이하게 부드러웠다. 고통을 겪어내고도 당당하게 자신만의 충만함을 이루고 있는 작은 세계 같았다. 구불구불 좁은 골목길들은 자기만의 옛이야기를 담고 있는 듯했다. 강을 끼고 무너진 성벽을 따라 하염없이 걷는 길은 더 먼 옛적 이야기를 전해주는 듯했다. 그날 나는 무언가를 보려고 이리저리 골목길을 헤매었는데, 무엇을 보고 싶었는지 지금은 기억나지도 않는다. 불과 몇 년 지나서 기억도 나지 않는 것이 그때는 왜 그리 보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허망하게 헤매다가 다시 구시가지의 중심인 소코도베르 광장에 돌아왔을 때였다. 많은 관광객이 북적대는 그 광장 주변 골목길에서 우연히 세르반테스 동상과 마주쳤다. 그때 나는 낡은 방패를 들고 야윈 말을 탄 돈키호테처럼 지쳐 있었다. 반면 그 세르반테스 동상은 책을 들고 멋지게 서 있었다. 고개를 조금 치켜들고는, 삶의 허망함을 모르는 척 시치미 떼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몇몇 여행객은 여러 자세로 그 동상과 사진을 찍으면서 즐거워했다. 돈키호테의 흉내를 내는 사람도 있었다. 그 옆에 땅딸막한 산초처럼 웅크리고 앉기도 했다. 모두 돈키호테와 함께 삶의 허망함을 웃어넘기는 듯했다. 그곳에는 돈키호테와 같은 유쾌한 열정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그 작은 골목길이 좋았다. 고통을 넘어선 톨레도가 좋았다.
마법에 빠진 이 세상을 구하겠다고 나선 돈키호테의 모험담은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으로 끝난다. 슬픔에 빠져 고향에 돌아온 후, 그는 열병에 들어 엿새 동안 앓아눕는다. 일곱째 되는 날, 정신을 차리고는 자신의 미친 열정을 반성하며 유산을 정리한다. 그 후 사흘간 정신이 오락가락하다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죽는다. 『돈키호테』를 읽으면서 나는 많이 궁금했다. 떠나는 마지막 순간, 마법에 빠진 이 세상을 더 이상 구하지 못하게 된 돈키호테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떠올랐을까. 삶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고 떠나는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는 마지막 순간 무엇이 떠오를까. 퓰리처 수장작인 미국 작가 폴 하딩(1967-)의 『팅커스: 땜장이들』은 그 답이 될 수 있겠다.
『팅커스』의 팔순 쯤 된 주인공 조지는 병상에 누워 죽기 여드레 전부터 환각에 빠지기 시작했다. 돈키호테처럼 정신이 오락가락하면서, 그는 자신의 몸과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낀다. 그 혼란스러운 소멸 과정에서 무엇보다도 땜장이였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뒤죽박죽 떠오른다. 사는 동안, 조지는 아버지를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어려서부터 그는 “자신이 미친 아버지를 두었다는 사실에, 그 아버지를 사랑하고 동정하고 미워한다는 사실에 화가 나 울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막아야 했다.” 그러나 죽음의 자리에 눕자,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아버지는 먹고살기 위해 짐수레를 끌고 다니면서 허드렛일을 하던 땜장이였다. 죽도록 일하고도 사기꾼인 책임자에게 늘 돈을 털리는 숙맥이었다. 그러면서도 시골길에서 자연을 즐기는 시적인 감성을 지닌 분이었다. 땅거미가 질 무렵이면 “그 속으로 기어들어가 조용히 앉아서 밤의 느린 흐름과 하나가 되고” 싶어 했다. 장사를 내팽개치고 숲길에서 하루 종일 백 송이 야생화를 꿰어 태피스트리를 만들기도 했다.
조지의 아버지에게는 심각한 지병인 간질이 있었다. 그에게 간질은 “번개에 의해 안으로부터 쪼개져 열리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 고통이 올 때면 “선한 의도를 가진 어떤 존재가 그에게 특별한 선물을 주고 싶어 문 뒤에서 전기를 숟갈로 떠먹여주는 것 같았다”라고 할 정도로, 고통을 긍정하는 힘을 지닌 분이었다. 반면 조지의 어머니는 현실적으로 강인한 여자였다. 찢어지게 가난한 살림이었고, 아들 둘과 딸 둘을 키워내야 했다. 어머니는 강한 의무감으로 살림을 꾸려나갔고, 남편에게 발작이 올 때쯤에는 아이들이 안보는 곳으로 이끌어서 처리하곤 했다. 그러나 어느 날 아버지는 식사 자리에서 갑자기 발작을 일으켰고, 이를 처리하려던 어린 맏아들 조지의 손가락을 끊어질 정도로 물었다. 참다못한 어머니는 아버지를 정신병원에 보내려 했다. 이를 알아챈 아버지는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삶의 고통을 품위 있게 인내해온 아버지로서는 자신의 고통을 부정하는 아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조지가 보지 못한 할아버지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이상할 정도로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목사였던 그분은 악마도 그리 나쁜 것은 아니라고 했다가 교회에서 쫓겨나고, 결국은 정신병원으로 보내졌다. 그 아버지가 숲으로 사라지자, 아들은 아버지를 찾으러 나섰다. 그러고는 “만물 자체가 마침내 해체되어, 색색의 빛 깃촉들이 그 형태만 유지해주고 있는” 듯한 숲의 호수에서 자정이 지나도록 머물다가 첫 간질 발작을 일으켰다. 조지의 아버지의 간질은 사랑에서 비롯된 고통인 셈이었다. 아버지는 고통이 깃든 자신의 삶을 감내하면서 살다가, 평화롭게 죽었다. 환각 속에서 그 아버지를 뒤죽박죽 떠올리던 주인공 조지 역시 아버지처럼 평화롭게 죽었다. 그가 죽는 순간 떠올린 건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만났던 기억이었다. 그는 그 사랑을 기억하면서 이 세상을 떠났다.
우리 모두의 삶은 사랑 때문에 고통스럽다. 마지막 떠나는 순간까지도 사랑 때문에 고통스러울 거다. 자신의 미친 열정을 부정할 수밖에 없었던 돈키호테도 삶에 대한 못다 한 사랑 때문에 마지막 순간 고통스러웠을 거다. 『팅커스』의 주인공 조지도 못다 한 사랑 때문에 마지막 순간 고통스러웠을 거다. 그래도 그들은 사랑했던 기억 때문에 평화롭게 떠날 수 있었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
웨일즈 시인 딜런 토마스(1914-1953) 역시 고통스러웠다. 경제적으로는 가난했고, 육체적으로는 병약했고, 기질적으로는 예민하고 무절제했다. 시대적으로도, 일차세계대전 이후 극심하게 혼란스러운 때였다. 이러한 개인적·사회적 상황에서도, 그는 삶을 사랑했다. 삶을 사랑하기 때문에 죽음이 더 두려웠는지, 토마스의 시는 죽음을 거듭거듭 다루고 있다. 그의 많은 시는 죽음이라는 불가항력적인 힘 앞에서 불안하면서도 폭발적인 삶의 활기를 내뿜는다. 그는 쉽게 죽음을 긍정할 수 없었던 거 같다. 「꽉 잡아라, 뻐꾸기 우는 계절 이 아득한 때(Hold Hard, These Ancient Minutes in the Cuckoo’s Mouth)」 역시 그러하다.
꽉 잡아라, 뻐꾸기 우는 계절 이 아득한 때,
글라몰간 언덕 위 엉성한 봄 나무숲 아래,
초록 잎새 치솟는 이때, 휘몰아가는 시간을 꽉 잡아라:
사냥개 뒤에 달고 신나게 달리는 시골 사람처럼,
시간은, 그 숲에서 달리며,
남녘에서 꾸물거리는 아이들을 내몰아간다.
시골엔, 여름은 기쁠 텐데, 십이월 웅덩이들이
기중기, 급수탑, 그리고 볼품없는 나무 옆에 머물며
사월에 그저 머물러 있고, 새들은 날아가 버리고 없으니;
꽉 잡아라, 옛 이야기 속의 아이들아,
사슴이 추적당해 쓰러지듯이, 푸르른 숲은
첫 사냥 계절, 죽어 가나니, 여름의 사냥감을 꽉 잡아라.
그리고 이제 사냥의 뿔피리 소리, 시 같은 소리로,
흰 눈 같은 기사들을 불러들이고, 언덕은 네 줄 현으로,
바닷가 계곡 너머 크게 울리며, 바위 꿈틀이게 하는데;
장애물과 사냥총과 경주 난간들은, 바윗돌들 들썩이자,
총 쏘듯이, 뼈 시린 사월을 바스러뜨리고,
엉성한 나무숲의 사냥꾼과 꽉 잡은 희망을 엎어버린다.
대기(大氣)가 네 발로 터덜터덜 벌건 땅에 내려앉아,
질질 피 흘리며 아이들 가까이 다가오고,
시간이, 계곡을 안장 삼아, 물밀 듯이 달려오는데;
꽉 잡아라, 시골 아이들아, 매 한 마리 하강하자,
황금빛 글라몰간 곧추서는데, 떨어지는 새들을 꽉 잡아라.
봄이 미친 듯 달린다 해도, 여름은 기쁠 터이니.
시인은 지금 글라몰간 언덕이 있는 고향에 있다. “뻐꾸기 우는 계절”인 사월이다. “십이월 웅덩이들이/ 기중기, 급수탑, 그리고 볼품없는 나무 옆에” 아직 머물러 있고, 날아간 새들은 아직 돌아오지도 않았다. “초록 잎새 치솟는” 때이지만, 아직 녹음이 제대로 우거지지 않은 초봄이라 봄 나무숲은 엉성하다. 초봄은 인생에서 보자면 소년기에 속한다. 다 자라지 않아 엉성하게 풋풋한 나이이다. 제대로 인생을 즐길 줄도 모른 채, 삶의 “남녘에서 꾸물거리”고 있을 뿐인 나이이다. 반면 시간은 “사냥개 뒤에 달고 신나게 달리는 시골 사람처럼” 마구 달리면서, “남녘에서 꾸물거리는 아이들을 내몰아간다.” 아이들이 머무는 푸르른 숲은 “사슴이 추적당해 쓰러지듯이” 쓰러져간다. 그러하니 시인은 “꽉 잡으라”고 아이들에게 거듭 말한다. “휘몰아가는 시간을” 꽉 잡으라고, 그 시간이 떨구어 버리려는 것들을 꽉 잡으라고 말한다.
시인은 마구 달려오는 죽음의 시간을 묵시록적인 이미지로 보여준다. 그 죽음의 시간에 “사냥의 뿔피리 소리”가 시처럼 울리며 “흰 눈 같은 기사들”을 불러들인다. 언덕이 마치 “네 줄 현”으로 연주하듯이 “바닷가 계곡 너머 크게” 울리자, 바위가 꿈틀거리며 살아나 “뼈 시린 사월”을 바스러뜨린다. 그 봄의 “엉성한 나무숲”에서 사냥하던 사냥꾼도, 그들이 꽉 잡고 있었던 희망도 엎어버린다. 그러할 때 대기(大氣)는 짐승처럼 “네 발로 터덜터덜” 걸어와 피로 물든 “벌건 땅에 내려앉아,/ 질질 피 흘리며 아이들 가까이” 다가온다. 그 묵시록적인 죽음의 시간은 “계곡을 안장 삼아, 물밀 듯이 달려”온다. 삶의 시간은 엉성한 봄이 지나가듯이 그렇게 “미친 듯” 달려가고, 죽음의 시간이 다가온다. 그러하니 시인은 삶에서 나가떨어지지 않도록 “꽉 잡으라”고 아이들에게 거듭 말하는 거다.
토마스는 「묵시록」이 예언하는 새 하늘 새 땅에 대한 믿음은 없었다. 술과 방탕으로 삶을 찬양했던 그는 서른아홉 푸르른 나이에 18병의 위스키를 마시며 타향인 미국의 낯선 호텔에서 죽어버렸다. 푸르른 삶을 꽉 잡고 싶었던 토마스는 마지막 순간 삶에 대한 못다 한 사랑 때문에 고통스러웠을 거 같다. 그래도 그 역시 사랑했던 기억 때문에 평화롭게 떠날 수 있었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
스페인 여행 첫날 콘수에그라로 가려는 내 하루가 없어졌다. 돈키호테처럼 미친 열정으로 삶을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렸다. 그렇게 살 수도 있었을 내 젊은 날은 지나가 버렸다. 그러나 삶의 고통이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그래서 고통은 아름다울 수 있는 것임을 깨달을 시간은 나에게 아직 남아 있을 거다.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의 마지막 순간 다가오는 것은 사랑의 기억이리라고 나는 믿는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