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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저녁

아버지의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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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9년 03월 05일
쪽수, 무게, 크기 368쪽 | 402g | 152*225*30mm
ISBN13 9791186644812
ISBN10 1186644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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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가족이 다 모여있는데도 적적하기만 하다. 멀리에서 종소리가 들린다. 부석사에서 저녁 예불을 드리는 종소리였다. 아련하기만 하다. 작은 개울 건너서 아버지의 포도밭이 보였다. 포도밭은 야트막한 산자락 밑에 있었는데 산허리가 잘록했다. 어떻게 보면 등이 굽은 아버지의 허리 같기도 하고 포도밭은 자글자글 늙은 아버지 같기도 했다. 우리 가족에게는 유일한 생계의 땅인데도 나에게는 왜 그렇게도 먼 이국의 땅처럼 보여지는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의 저녁」중에서

다방의 인력은 시간과 돈이 맞물려 있었다. 배달은 우주왕복선처럼 빠르게. 티켓은 한 시간에 이만원. 쓰나미의 나라 일본은 얼만지 몰라도 대한민국은 전국이 비슷하다. 다방의 질서는 나라님들이 만드신 국법보다 칼 같이 지켜진다. 국회의사당처럼 멱살잡이도 하지 않는다. 나가서 몸을 팔든 공연을 하든 시간당 일만 원은 공연비로 나가고 나머지는 내 수입이다. 많이 뛰면 뛴 만큼 벌기도 하지만 돈을 벌기 위해 몸뚱어리 작살나는 손비 처리도 감안해야 한다. 왕언니 말씀에 의하면 몸이 재료고 재료가 곧 돈이었다. ---「공연」중에서

삼일장이 무사히 치러졌다. 양지바른 언덕에 유택이 마련되었다. 산허리 비스듬히 부석사가 보였다. 나도 모르게 나무관세음 보살을 읊었다. 아들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망인과 어떤 관계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가르쳐 주고 말 것도 없었다. 세상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배우게 되는 것들이 내 어린 시절에도 있었다. 있어서는 안 될 일도 일어나고, 안 될 일이 일어남으로써 그 치유하는 방법도 스스로 터득하게 되는 것이 세상에는 수두룩했다. 이젠 되돌아 가야할 시간이다. 하회 아줌마에게 깊이 고개를 숙이고 차에 올랐다. ---「거미」중에서

점심 때 시작한 회의는 저녁나절이 되어서야 흐지부지 끝났다. 결론도 조잡하게 끝났다. 이장이 공사장 측과 전화 통화로 형철이네 송아지 값만 물어준다는 걸로 종결을 지었다. 그래도 회의는 또 열릴 것이다. 저수지 둑 높이는 이미 다 올라갔는데 마을 사람들 인심 수위는 점점 낮아졌다. 강 선생도 마을 회관을 나왔다. 지구재활용이라는 생소한 단어가 자꾸만 귀에 거슬렸다. 돌아오는 길에 개미 떼가 있던 자리를 보았더니 저수지 공사장처럼 아직도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미물인 개미 떼들의 공사도 만만치 않은 갈등이 있었는지도 몰랐다. ---「지구재활용」중에서

“오빠, 조금만 기다려. 내가 무슨 짓을 해서라도 꼭 빼내 줄께.”
그리고 그녀는 돌아섰다. 그녀가 막상 돌아서자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가 무슨 힘이 있어 나를 빼내줄 것인가? 무슨 짓을 해서라도 빼내준다면 그 무슨 짓은 뻔한 것 아닌가? 그런데 그 무슨 짓이라는 것이 과연 나를 위한 것이기는 할까?
많은 물음표를 남겨 놓고 그녀는 또각거리는 구둣발 소리를 내며 내게서 멀어져 갔다. 나는 쌔무워커를 내려다보았다. 명자의 앳된 얼굴이 구두 발 끝에 걸려있었다.
---「쌔무워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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