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에 당시 사장이던 찰스 커랜(Charles Curran)은 BBC가 “지배층의 창작물이고 그 존속 여부는 지배층의 의지에 달려 있다”라고 통찰했다. 그러나 그는 “BBC의 역할의 본질은 질문하는 것이기에 전복적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다”라고 지적했다. … BBC 저널리즘이 사회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이었던 적은 거의 없지만 1960년대의 자유주의적이며 급진적인 정치문화는 비판적이며 독립적인 보도의 전통을 형성했다. 특히 시사보도 부문에서 그랬다. 진보적인 휴 그린(Hugh Greene) 사장의 재임 기간 동안 BBC는 덜 엄격한 방송 스타일 채택, 사회적 의식을 지닌 드라마와 풍자적 프로그램 제작으로 요약되는 문화적 변화를 겪었다. --- p.14
30년 뒤, 리스는 이때 일들을 회고하면서 “만일 프랑스 혁명 당시에 방송이 있었다면 혁명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썼다. 그는 혁명은 거짓말과 오보에 기초하기 마련인데 총파업 기간 동안 BBC는 ‘진실 보도’의 역할을 수행했다고 보았다. 그는 BBC가 내내 ‘정부의 편’에 서고 ‘법과 질서’를 옹호한 것이 매우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 p.22
사실 BBC는 그 자신의 기관적 성격, BBC가 가지는 독립성의 본질, BBC와 정부 또는 국가 간의 관계 등의 문제들을 포함해 많은 중요한 정치적 논쟁이 벌어지는 장이었다. 이런 ‘모순들’은 BBC 내부의 논쟁뿐만 아니라 사회의 권력분배를 놓고 벌이는 보다 광범위한 다툼과도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로 인해 그림은 더 복잡해졌다. BBC의 독립이라는 개념은 이들 정치적 갈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 p.37
BBC의 경우 충원이 대놓고 정치적으로 이루어져왔다. 강한 옥스브리지 지향성과 함께, 특히 1990년대 이래 BBC와 국회 간 인적 교류가 활발해졌다. … 이 관행은 국가가 BBC에 강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 관행은 BBC의 ‘공정성’을 지키는 데, 그리고 편집권을 실행하고 이를 위한 여러 시스템을 보호하는 데 이 관행이 유효한 체계라고 판단한 BBC 지도부에 의해 조장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공정성’과 국가에 의해 정의된 국가이익 간의 고전적 융합을 목도하게 된다. --- pp.39~40
폭로 이후, 전복성 조사는 내외의 압력을 받아 곧 폐지되었다. 저널리즘에 보다 많은 자유를 허용하라는 캠페인에 관여했던 BBC의 방송노조와 개별적인 뉴스 매체의 통합에 반대하는 투쟁 모임이 이러한 압력의 주체였다. 그런 그룹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정보기관에 의한 조사는 저널리즘의 자유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위 경영진에게 정보기관은 BBC의 독립에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라 소중한 동지이자 자산이었다. 이 점에서, 1983년 MI5와의 회의를 준비하며 작성된 BBC의 비밀문서는 각별히 시사적이다. --- pp.69~70
시사평론가들은 허턴 위원회 이후에 나온 여러 가지 조치가 BBC의 저널리즘에 미친 영향에 대해 다르게 평가한다. 전 BBC 기자 존 캠프너(John Kamphner)는 조사위원회 이후에 “BBC가 재갈 물린 언론이 되었고, 의도적으로 정부와 기성체제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 하고 있다”라고 기탄없이 말했다. 마시는 “허턴 위원회 이후 BBC는 보다 신중해지고 보다 위험을 회피하게 되었으며, 정부와 권력에 보다 덜 도전적이 되었다”라고 썼으며, 다이크가 사퇴한 뒤 곧바로 사장이 된 마크 바이포드(Mark Byford) 아래에서 BBC의 저널리즘은 좀 더 위험기피적이 되었다고 보았다. --- p.85
그와 같은 결과는 BBC의 일반적인 저널리즘 문화를 반영하고 있다. 즉, 이해의 강도에 따라 이슈가 선택되고 제시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그것은 또한 위기 동안 BBC가 받는 극도의 정치적 압력을 반영하고 있다. 이런 사실은 이라크 사태와 관련된 문서들에서 분명하게 밝혀졌다. 샘브룩은 2003년 6월 27일에 “총리실은 전쟁에 이르기까지의 보도와 전쟁 국면에서의 보도에서 BBC를 위협하려 했다고 우리는 굳게 믿는다”라고 기록했다. --- p.109
블레어 수상은 개인적으로 다이크 사장에게 불평하기도 했다. BBC가 ‘지지 의견과 반대 의견 사이에서, 뉴스와 비평 사이에서, 이라크 체제의 지지자와 반대자 사이에서, 또는 우리가 가진 외교적 지지와 반대 사이에서 균형을 제대로 잡지 못했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정부의 지원에 의존하고 있는 BBC 지도부가 그런 불만을 무시할 수 없었으리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 p.111
영국사회에서 BBC가 담당해야 하는 역할을 적절하게 개념화하려면 우리가 그런 갈등들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만 그런 갈등이 연상시키는 ‘독립성’의 정도를 과장하지 않아야 한다. 더욱이 보다 완전한 그림을 그리려면 BBC와 정부 관리들이 공모했다는 증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갈등과 위기의 시절에 많이 간과되었던 특징이다. 그것은 자주 국가와 BBC 간의 단순한 싸움으로 간주되었다. 그렇지만 이는 자세히 들여다보면 훨씬 더 복잡한, 그래서 더 혼란스러운 권력의 유형과 영국에서 권력이 미치는 영향력을 보여준다. --- p.117
의회 및 정부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고위 임원 상당수가 사립학교 출신의 상위 중산 계급임에도 BBC는 완고한 우익 비평가들에게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정치 엘리트와 점차 멀어진 BBC가 왜 진보적 엘리트주의라는 비판에 취약했는지, 또 왜 마크 톰슨 사장 시절 시청자들과 정치적으로 가까워지기 위해 우편향된 편집방침을 도입하는 섣부른 시도를 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 p.145
시턴이 보기에 ‘BBC가 직면했던 가장 단호한 맹습에도’ BBC가 살아남은 것은 프로젝트의 성과였다. 프로젝트의 목적은 첫째로 ‘BBC를 정부로부터 구하는 것’이었고, 둘째로 ‘내부로부터 BBC를 재설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턴이 인지하지 못한 것은 이런 재설계가 정치적 압력 아래 진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처가 시작한 사회적·정치적 변화 프로젝트의 일부였다는 것이다. BBC는 자신의 존재를 위협하는 것들을 극복했지만 존속의 대가로 부상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질서를 수용해야 했다. --- p.169
버드 보고서에는 이렇게 여러 주장이 섞여 있다. 반비즈니스 성향의 증거를 찾아내진 못했지만 이 보고서는 BBC에서 지배적인 소비자 지상주의의 관점이 사주와 노동자 양쪽의 관점을 가렸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BBC가 보도에서 비즈니스의 관점을 진작하기 위해 동원한 많은 자원을 고려하면 전혀 그럴듯하지 않다. 좀 더 납득이 가는 결론은 BBC 비즈니스 보도가 신자유주의에 적응하기 위한 전략적 수단으로 강력한 소비자 지상주의를 채택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비즈니스 업계에 동조하는 보도를 하던 관행과 자주 갈등을 빚었고 그와 동시에 시청자를 노동자나 시민으로 인식하지 못하도록 했다. --- p.220
리스는 보다 실질적인 의미에서 민주주의를 위한 시간을 거의 갖지 못했다. 악명 높은 권위주의자였던 그는 대중이 방송에 참여해야 한다거나 많은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기대 또는 의욕이 없었다. 그는 대중적인 기호를 무척이나 깔보았고, 시청자들을 BBC의 산물을 단지 수동적으로 수신하는 사람들로 생각했다. … 그는 ‘권위와 책임이 부여된 기관’은 어디라도 이와 같이 ‘전제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리스는 당시 민주주의자가 전혀 아니었고 그 시대의 대다수 사람들처럼 방송이 계급 갈등을 해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는 국가주의자였다. 이것이 아마도 그가 파시즘의 목표들에 놀랍도록 호의적이 된 이유일 것이다. --- p.230
지난 수십 년 동안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의 급속한 변화로 인한 실질적인 영향은 기업들이 문화적 생산품, 특히 저널리즘으로 돈을 벌기가 갈수록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이런 문화 상품은 이제 별도의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복제될 수 있고 또 재분배될 수도 있게 되었다. … 얄궂게도, 우리는 이제 저널리즘 및 문화 생산의 가장 효율적인 시스템으로 인해 제작 시점에 공개적으로 자금을 지원받고 무료로 모든 사람에게 이를 전달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했다.
--- p.2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