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계는 가공할 만한 폭력으로 조직되어 있으며 이 폭력은 우리의 존재와 인간적 삶을 끝없이 위협한다.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치부하는 것은 어른들의 몫이다. 가련할 정도로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들인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장애, 가난, 불륜, 낙태, 성폭력, 죽음이라는, 우리의 존재를 위협하는 이 심각한 항목들을 어떻게 당위로 받아들일 것인가.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집은 인간의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들에게 당위의 작위를 주기를 거부하는 청(소)년들의 집요한 자기 싸움의 기록이다. ---해설중에서
“임신했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붕 떠 있는 기분이었어. 맨날 새처럼 날아다니는 꿈만 꾸었고, 아기 이름도 새와 관련된 것으로 정해주려고 생각하고 있었어. 몸에 아기가 들어왔다는 것이 느껴질 때부터 나무랑 풀이랑 새들이 많은 숲에 자주 갔어. 땅속에다 깊이 뿌리 내린 나무와 같은 황홀감을 맛보고 싶었거든. 그러자 내가 나무가 되는 꿈을 꿨어. 내 가지에 수많은 새들이 와서 둥지를 틀었어. 나는 그런 꿈만 꾸었지, 이런 일이 생기리라고는·····. 채영아, 이모는 멀쩡한데 배 속에 있는 아기가 멀쩡하지 않다고 하니까 받아들일 수가 없어.” 나는 작은이모의 힘겨운 눈빛을 받아내면서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는데, 지금 이모의 상태로 봐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매운 고춧가루가 범벅이 된 떡볶이로도 어찌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지금 이모한테는 매운 음식보다 더 자극적이면서도 더 절대적인 힘을 가진 마법의 약이 필요할지도 모른다.---p.20
나는 두 손을 배 위에다 모아서 깍지를 끼고는 한껏 힘을 주었다. 그럴수록 손은 더 떨렸다. 여전히 사랑니는 완강하게 저항하고 있었다. 나는 깍지를 풀고 배를 쓰다듬었다. 무엇인가 배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어쩌면 사랑니가 배 속에도 있는지 모른다. 지금 의사의 눈에 보이는 놈은 수많은 사랑니들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진짜 우두머리는 내 배 속 아득한 곳에 숨어서 끝까지 버티라고 지령을 내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
아, 얼마나 아팠을까, 넌, 넌, 넌······ 자궁 속에 있는 사랑니를······ 아, 아, 아······ 난 한 번도 그런 생각 하지 않았어. 네가 수술하러 가는 날까지, 내 앞에서 막 뛰어가는 너를 볼 때까지. 은근히 너를 미워하기도 했어. 왜 나를 그런 일에 끌어들이는지······ 얼마나 힘들었을까.---p.80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만으로도, 집을 에워싸고 있는 나무와 풀과 온갖 살아 있는 것들의 몸에서 우러나는 빛만으로도 이 작은 마당은 환했다. 여기서 살아갈 때는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밤에 마당이 환하다는 생각도 처음이고, 마당 색이 참 곱다는 생각도 처음이고, 하여 신발 벗고 다니면 발바닥에 닿는 감촉이 괜찮겠다는 생각도 처음이다. 왜 이제야 이런 것들이 느껴지고 보일까. 내가 무엇이든 더디고 느려서 그때그때 상황을 파악하는 게 아니라 그 시기가 지나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걸까. 그렇게라도 되기만 한다면 좋겠다. 늦어도 좋으니까 다른 사람들이 깨닫고 느끼는 것만큼 알았으면 좋겠다.---p.154
마당가에 봄꽃들이 푸지게 피어나던 4월 어느 날 나는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수십 개의 토끼장이 텅 비어 있었다. 나한테 한마디 상의도 없이 어머니가 토끼들을 팔아치웠다는 걸 알았다. 눈물만 흘러나왔다. 그 토끼들은 내가 키우는 동물들이다. 내 돈으로 어린 새끼를 사 왔고, 내가 설계하여 집을 지었고, 내가 먹이를 주었다. 슬프고 아리고 허탈했다. 나는 분노하고 싶었다. 물론 어머니라는 절대자 앞에서 나는 아무런 분노도 할 수 없었다. 내가 분노하면서 반발한다고 해서 내 말이 옳다고, 단 한순간이라도 나를 이해해주고 내 편을 들어줄 어른도 없었다. 내 편이라니, 마을 어른들은 오히려 저런 호래자식이 있나, 하고 오히려 나무랄 것이다. 그까짓 토끼 몇 마리 때문에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준 어머니한테 대든다고. 나는 그게 더 억울했다. 내가 한마디도 반항할 수 없는 이 세상이 더 미웠다. 그날부터 나는 밥 한술 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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