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거야. 형! 내가 찍었어."
"응? 뭐라고?"
주성은 담담한 수창의 말에 당황해서 알아들었음에도 되묻고 말았다.
"알아두라고."
그가 피식 웃었지만 그건 분명 경고였다. 손을 치우고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유리벽을 바라본다. 뭔가 이상했다. 한 번도 이런 짓을 한 적이 없는 녀석이었다. 소유권 주장을 하는 놈이 아니었다. 그런데 처음 보는 여자에게 필이 박힌 수컷처럼 굴다니.
의아한 얼굴로 수창을 보다가 주성 역시 유리 벽 쪽으로 시선이 돌아갔다. 거기엔 이제 막 도착한 웨이터가 여자에게 가서 뭐라고 얘기했지만, 그녀는 손을 저어대고 있었다. 웨이터가 이쪽을 올려다 본 후 다시 그녀의 손을 힘껏 잡아당기자 여자의 몸이 일으켜 세워졌다.
그 모습을 보던 일행이 끌려갈 뻔한 그녀를 반대편으로 당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번엔 다른 웨이터들도 합세했고, 그녀의 친구들은 더욱 힘을 내며 나섰다. 중간에 낀 여자가 아픈지 소리를 지르며 겨우 빠져 나와 웨이터와 싸울 듯이 뭐라 얘기를 나누더니, 유리 벽 쪽으로 갑자기 고개를 홱 쳐들었다. 그리곤 주먹을 쥐며 높이 치켜 올렸다. 깜짝 놀란 주성과 달리 수창은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알아서 화난 모습으로 거칠게 오는 여자와 그 뒤를 곤혹스러운 몸짓으로 강아지처럼 따라오는 웨이터가 곧 들이닥칠 기미가 보였다.
얼마 안 있어 문이 활짝 열리더니 유리벽을 통해 아주 조그맣게 봤던 여자가 씩씩거리며 서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미인이었다. 커다란 눈동자와 붉은 입술에 어린 분노가 사랑스런 얼굴이 흐려질 만큼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지만, 그녀만의 독특한 아름다움은 훼손되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마음이 진동을 일으켜 보는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만큼 자극적이었다. 그것은 주성만의 생각은 아닌 듯, 거기 있던 녀석들의 시선이 옆에 끼고 있던 파트너가 아닌 술과 분노에 취한 눈앞의 이름 모를 여자에게 모아졌다.
"누구야? 날 끌고 오라고 한 놈이?"
예쁜 여자에게서 나온 그 어울리지 않은 거친 말에 모두 어안이 벙벙한 가운데서도, 유리벽에 몸을 기대고 마치 객처럼 구경하던 수창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름이 뭐야?
"너야?"
느릿하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몸을 돌린 여자는 질문을 무시한 채 손을 뻗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화난 어조로 물었고, 그는 미소를 지우지 않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여자의 눈이 조금씩 흔들렸다. 키가 큰데다 그에게서 과도하게 나는 상류층 향기는 사람들을 현기증 나게 할 만 했다. 그녀는 문득 그가 자신을 왜 불렀는지 궁금한 얼굴이 되었다.
"왜?"
그가 피식 웃었다.
"왜? 네가 마음에 들어서. 나랑 나가자. 재밌게 해줄게."
여자의 눈이 커졌다. 코앞까지 다가온 남자의 뻔뻔하고 노골적인 유혹과 주량을 넘어선 술기운, 거기다 동물원 동물 구경하듯 자신을 보는 이 난장판의 사람들이 그녀를 열나게 한 듯했다. 이마에 주름이 잡히며 인상을 쓰더니 갑자기 탁자에 있던 술이 가득 찬 잔을 보는 동시에 들어 남자에게 부어버렸다.
"윽."
놀라는 주위 사람들의 반응과 상반되게 위스키의 갈색 액체가 수창의 잘생긴 얼굴을 흘러내리고 있는데도 그는 감정변화가 없었다. 마치 그러길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처럼 여자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 옷 되게 비싼 건데, 물어줄 수 있어?"
줄무늬의 짙은 회색 양복에 위스키가 이미 얼룩으로 흘러내리는 걸 보며 그녀는 수백만 원이 넘는 돈을 생각했다.
"얼만데?"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그녀가 묻자 그가 더욱 다가섰다. 구경꾼이 있다는 것도 수창은 개의치 않았다. 원래 남의 눈을 신경 쓰지 않은 마음을 가진 놈이니 그들을 보는 시선도 대수롭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것도 낯선 여자와 무슨 짓을 저지르진 않겠지. 이주성은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인상적인 그 여자를 바라보았지만 그 위로는 단 몇 초 만에 깨져버렸다.
"다른 걸로 갚아. 나 돈 많으니까. 내가 원하는 걸로, 미적거릴 거 없겠지."
수창은 여자의 턱을 들어 올려 눈을 맞추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의 입술을 점령해버렸다. 여자도 정신을 못 차릴 만큼 빠르고, 거센 입맞춤에 주위 사람들의 얼까지 빼버렸다. 허리를 감아 자신의 몸에 바싹 붙이고 다른 손으론 뒷머리를 붙잡고, 순식간에 그녀의 입 안에 혀를 집어넣어 놀란 혀를 감으며 깊은 키스를 하던 그는 여자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먼저 놓아주었다.
그녀의 몸이 떨어지면서 휘청거리며 흔들렸다. 수창의 눈이 짙어졌다. 생각보다 여자는 그의 본능에 착 감기었다. 한 번 가지곤 안 되겠다는 계산이 서졌다.
정신을 겨우 차린 여자가 그를 아직도 약간 얼이 빠진 채 쳐다보았다. 그러나 곧 눈동자가 번지듯 커지더니 번쩍 빛이 나슴 순간, 크지 않은 손으로 남자의 뺨을 향해 세차게 날렸고, 그는 피할 수 있음에도 피하지 않았다. 짝.
"이번 한 번만이야. 앞으론 절대 안 돼. 난 폭력은 무조건 싫거든."
씩 웃는 남자를 여자가 분노와 혼란스러움이 가득 찬 얼굴로 노려보다가 도망치듯 나가버리자 그는 그녀의 등 뒤에 대고 덧붙였다.
"다음에 봐."
수창은 여자가 나간 곳을 뚫어져라 봤다. 주성은 이미 여자가 흔들렸음을 느끼고 씁쓸함을 느꼈다. 수창은 어디론 가에 전화를 걸며 유리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거기서 뒤늦게 씩씩거리며 일행들과 티격태격하는 여자의 모습을 보다가 웨이터가 와서 그에게 속삭이며 쪽지를 주는 걸 받았다.
"고마워."
그가 수표 몇 장을 지갑에서 꺼내 웨이터의 앞주머니에 꽂아주었다. 90도로 인사하는 웨이터가 나가자 그는 그 쪽지를 펴보았다. 거기엔 이름과 전공과목, 그리고 학교명이 적혀있었다.
"오연주! 이름도 마음에 들어. 고집이 느껴지네."
"어떻게 안 거야?"
주성이 묻자 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일행 중 한 명이 불었어. 술 취해서 제 정신들이 아니거든. 동아리 여자 애들끼리 의기투합하러 왔대."
선점한 사람의 웃음을 짓는 수창이 여유를 부렸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너희끼리 놀아. 난 가봐야겠어."
친구들의 불만이 쏟아졌다.
"야, 아직 네 첫 출근 축하도 안 했는데?"
"김수창, 너 위해서 마련한 자리잖아."
"놀다가."
축하 받고 가라. 아직 시작도……."
수창은 그들의 불만을 일소에 무시해버렸다.
"고마워, 축하해줘서. 갈게."
그가 나가버리자 투덜대던 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내기를 걸기 시작했다. 일주일이면 '오연주라는 여자에 대한 관심이 끝난다'에 압도적으로 걸고 있었지만, 주성은 불행하게도 이번은 그렇게 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여자들을 보던 김수창의 변덕스런 눈이 그 오연주란 여자에게만은 그 빛이 달랐다. 처음 보는 열기였다. 차라리 빨리 끝나는 것이 나을 텐데.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