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가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 짐작도 하지 못한 채 시키는 대로 했다. 순간 그가 책을 집어 들고 내게 던지려는 자세를 취했다. 나는 그제야 위기를 느끼고 몸을 피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날아온 책에 맞아 쓰러지면서 문에 머리를 부딪혔다. 상처에서 피가 흘렀고 쿡쿡 쑤셔왔다. 처음에는 무서웠지만 공포감이 절정에 이르자 다른 감정이 공포감의 뒤를 이었다. (p.13)
“나는 남들을 속이는 애가 아니에요. 내가 그런 아이였다면 외숙모를 좋아한다고 말했을 거예요. 하지만 나는 존을 빼놓고 는 외숙모가 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요. 외숙모가 나랑 한 핏줄 이 아니어서 다행이에요. 내가 어른이 되면 결코 외숙모를 보 러 오지 않을 거예요. 누군가 내게 외숙모를 좋아하느냐고, 외 숙모가 내게 잘해주었느냐고 물으면 생각만 해도 메스껍다고, 내게 정말 가혹했다고 말할 거예요. 사람들은 외숙모가 제 은 인이라고 말하지만 외숙모는 인정머리라고는 없는 사람이에 요. 남들을 속이는 사람은 외숙모예요!” (pp.32)
“그래, 네 외숙모가 네게 친절하지 않았다는 건 확실해. 하지만 그건 스캐처드 선생님이 내가 지닌 결점을 싫어하는 것하고 똑같아. 내게는 결점이 많아. 제대로 물건을 정리하지 못하고 주의도 산만해. 수업 시간에 다른 책을 읽기도 해. 스캐처드 선생님은 그런 나를 싫어하시는 거지, 학생들을 전부 싫어하시는 게 아니야. 외숙모가 너를 그렇게 대한 것도 마찬가지일 거야. 그녀가 싫어하는 결점을 네가 지닌 거지. 그런데 외숙모가 너를 그렇게 매정하게 대한 게 네 가슴에는 정말 깊은 상처를 주었구나! 난 누구에겐가 아무리 구박을 받아도 내 마음에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아. 내 가슴에 증오를 키우기에는 우리 인생이 너무 짧다고 생각해. 나는 우리가 이 육체라는 껍질을 벗어버릴 날, 그래서 우리 생명과 생각의 정수인 영혼의 불꽃만이 남게 될 날이 반드시 오리라고 믿어. 그 영혼의 불꽃은 창조주께서 피조물들에 생명을 불어넣으실 때처럼 순수한 거야.” (pp.57~58)
나는 그렇게 치욕의 걸상 위에 선 채 모든 사람의 주목을 받았다. 교실 한가운데 맨발로 서 있는 벌조차 치욕스러워서 받을 수 없다고 장담했던 내가!
당시 내가 어떤 심정이었는지는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저 숨이 막히고 가슴이 메어왔을 뿐이다. 그때 한 여학생이 내 곁을 지나가면서 내게 눈길을 주었다. 오, 그녀의 눈은 얼마나 신비로운 광채로 반짝이고 있었던가! 얼마나 묘한 감동을 내게 주었던가! 그녀가 내게 준 그 눈길, 그녀의 눈길이 준 감동이 내게 얼마나 큰 버틸 힘을 주었던가! (pp.65)
만일 그가 잘생긴 젊은 청년이었다면 그가 마다하는데도 굳이 도움을 주겠다고 나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내가 이 낯선 남자에게 말을 걸었을 때 그가 미소를 띠고 상냥하게 나왔거나 도와주겠다는 내 제안을 고마워하며 정중히 거절했다면 나는 다시 물어볼 생각도 못 하고 그냥 제 갈 길을 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찡그린 얼굴과 거친 태도 때문에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서 그가 어서 제 갈 길을 가라고 내게 손짓을 했을 때 나는 큰소리로 그에게 말할 수 있었다. (p.111)
“주인님, 단지 주인님이 저보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저보다 세상을 더 잘 안다는 이유만으로 제게 명령을 내리실 권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보다 우월하냐 아니냐는 주인님이 그 세월과 경험을 어떻게 사용하셨는가에 달렸지요.” (p.129)
그를 생각하면 감사하는 마음이 들고 즐겁고 정다운 말과 태도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는 내가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이 되었다. 그에게서 여전히 오만하고 침울한 태도가 보일 때도 있었지만 그 결점은 모두 그가 겪은 잔인한 운명의 탓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그가 천성적으로는 겉보기보다 훨씬 더 고결하고 훌륭한 심성을 지녔을 거라고 생각했다. (p.137)
나는 그녀와는 달리 어떻게 하면 실패하지 않을지 그 방법을 알고 있었다. 사실은 아주 간단했다. 그가 묻는 말에 그저 가식 없이 대답만 하면 되고, 필요할 때만 자연스럽게 그에게 말을 걸면 되는 거였다. 그것만으로 그를 기쁘게 할 수 있다. 나는 그 가 잉그램 양을 향해 짓고 있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과는 다른 표정을 이미 그에게서 보았었다. 그건 내가 그에게 수다를 떨 거나 아양을 떨 때가 아니었다. 실제로 나는 그래본 적도 없다. 다만 솔직하게 몇 마디 말만 해도 그의 표정은 더 밝아지고 그 의 말은 더 부드러워졌으며 그의 행동은 더 친절해졌었다. (pp.162)
내가 그녀에게 물었다.
“제게 삼촌이 있었군요. 왜 제게 이런 소식을 전해주지 않으 신 거지요”
그러자 그녀가 말했다.
“내가 너를 정말 싫어해서였다. 네가 잘되는 꼴을 볼 수 없었 어. 네 행동을 잊을 수 없었고, 어느 날 네가 내게 화를 내던 모 습을 잊을 수 없었어. 네가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밉다고 하던 말도 잊을 수 없었고. 어린애답지 않게 내게 퍼부었던 원한의 말들을 내가 어떻게 잊겠니? 나는 네가 무서웠어.”
“외숙모, 그땐 제가 너무 어렸잖아요. 그때 일은 다 잊어버리 세요. 제가 외숙모에게 상처를 주었다면 용서해주세요.” (pp.194)
“……잠에서 깨어났을 때 희미한 불빛이 비치고 있었어요. 저 는 벌써 아침이 밝은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건 촛불이었어요. 저는 소피가 들어온 줄 알았지요. 화장대 위에 촛대가 놓여 있 고 웨딩드레스와 면사포를 걸어놓은 옷장이 열려 있었어요. 저 는 ‘소피, 거기서 뭐 하는 거야’라고 물었어요. 그런데 아무 대 답이 없었지요. 그런데 옷장 쪽에서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어요. 그 사람은 촛불을 들더니 옷걸이에 걸려 있는 옷들을 살피는 게 아니겠어요? 얼굴이 보였는데 소피도 아니었고 레아도 아니었으며 페어팩스 부인도 아니었어요. 게다가 그 이상한 여자, 그레이스 풀도 아니었어요. 저는 당황했고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어요.” (pp.226~227)
내가 선택만 한다면 바로 그 안이 내 천국이 될 수 있었다. 단지 문을 열고 들어가 “로체스터 씨, 당신을 사랑해요. 영원히 함께하겠어요”라고 말만 하면 되었다. 내가 몰래 사라진 걸 알면 그가 얼마나 절망할까 하는 생각에 나는 자칫 문고리를 잡을 뻔했다. 그러나 나는 즉시 고개를 가로저으며 얼른 문에서 물러났다. (p.255)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아아, 이제 죽는 수밖에 없어. 이게 다 하나님의 뜻이야. 그분 뜻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어”라고 절망적으로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내 옆에 누군가 있었다. 내 말을 들은 듯 그가 내게 말했다.
“사람은 다 죽게 되어 있지요. 하지만 당신처럼 이렇게 죽게 되지는 않지.”
그 말을 하더니 그는 요란하게 문을 두드렸고 한나가 다시 문을 열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할멈, 할멈은 이 여자분을 쫓아내는 걸로 할 일을 다 한 거야.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게 해줘요. 일은 저분을 안으로 들이는 거야. 자, 아가씨, 일어나요. 어서 안으로 들어가요.” (pp.265)
“제인 양의 삼촌이신 존 에어 씨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마데이라에 살고 있던 분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제인 에어 양에게 전 재산을 물려주었고, 그 덕분에 당신은 부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내용은 그것뿐 다른 건 없습니다.” (p.395)
그때였다. 갑자기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이 내 심장을 꿰뚫고 지나갔다. 마치 번갯불처럼 예리하고 충격적이었다. 이제까지는 몽롱한 상태였던 내 의식이 갑자기 깨어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와 함께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제인, 제인, 제인!”
그 소리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오, 도대체 어디에서 온 소리일까? 분명히 들리기는 했는데 집 안에서도 집 밖에서도 들려온 소리가 아니었다. 그 소리는 허공에서도, 땅에서도, 하늘에서도 들려온 소리가 아니었다. 하 지만 나는 그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그리고 그건 분명 사람의 목소리였다. 내가 잘 아는 사람,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내가 너무 도 잘 기억하고 있는 그 사람, 에드워드 로체스터 씨의 목소리 였다. 고통과 절망에 빠져 다급하게 나를 부르고 있었다.
“갈게요! 기다리세요! 제가 갈 거예요!” (pp.317~318)
그가 미소를 짓더니 내게 말했다.
“제인, 나와 결혼해주겠소”
“네.”
“당신이 손을 잡고 인도해주어야 하는 가엾은 남자인데도 말이오? 당신보다 스무 살이나 많고 시중이나 들어야 하는 장애인인 데도 말이오”
“물론이에요.” (p.333)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