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현실은 이용자에게 현존감(sense of presence)을 전달하고, 이용자는 그 세계의 시민이 된다. 그리하여 자신이 의존하고 있는 장치와 미디어의 존재감마저도 잊는다. 오늘날 컴퓨터 그래픽(CG), 증강현실(AR, Augmented Reality), 혼합현실(MR, Mixed Reality), 가상현실(VR, Virtual Reality) 등은 모두 그러한 투명성의 비매개를 지향하면서 이용자의 몰입감을 끌어낸다. 역사적으로 미디어가 자신을 지움으로써 투명성을 획득한 사례는 다양하다. 선사시대의 동굴벽화, 르네상스의 원근법 회화, 중세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18세기 말의 매직랜턴, 19세기의 사진과 영화 모두 이미지와 관람자 사이의 물리적, 심리적 거리감을 최소화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초기 영화의 경우 말하기(telling)보다는 보여주기(showing)를 더 강조했는데, 그것은 관음증적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관객의 시선을 매혹적인 볼거리로 끌어당겼다는 점에서 어트랙션 영화(cinema of attraction)로 명명되고 있다. 이 시기의 영화 관객들은 정지된 이미지가 살아 움직인다는 것 자체에 흥분했다. 몰입 미디어의 전사라고 할 수 있는 초창기 어트랙션 영화는 드라마틱한 이야기 구조가 있는 서사영화보다는 움직이는 이미지를 실감나게 체험할 수 있게 해주는 엔터테인먼트에 더 가까웠다.“
---「오큘로 편집부, “A Critical Dictionary of Virtual Reality”, ‘Archaeology’」 중에서
“선택이라는 행위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영상의 서사를 구성하는 양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넷플릭스는 몇 년 전부터 [장화 신은 고양이: 동화책 어드벤처](2017), [스트레치 암스트롱: 도시를 구하라](2018)와 같은 어린이용 인터랙티브 드라마를 꾸준히 선보여 왔는데, 최근에는 성인용 콘텐츠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2018)를 통해 인터랙티브 기반 서사물이 상당히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선택이 실질적으로 새로운 서사 양식일 수 있을지는 사실 모호하다. 기존의 인터랙티브 기반 서사는 대체로 일종의 미로 구조와도 같다. 두 갈래의 길목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고, 막다른 길에 다다르면 거기서 돌아 나가야 한다. 무수히 많은 선택들에 의해 이동 경로가 임의적으로 정해지는 듯하지만, 결국 되돌아봤을 때 그것은 이미 정해진 경로이며 단 하나의 출구로 이어진다. 이는 분명 로베르트 발저가 그려내는 우발적 이야기를 품은 산만한 “산책”과는 대척되는 걷기의 방식일 것이다.”
---「오큘로 편집부, “A Critical Dictionary of Virtual Reality”, ‘Controller’」중에서
“VR 영상에서는 하나의 숏이 시작하는 순간 그 공간은 이미 하나의 완벽하게 단일한 돔 형태의 공간으로 제시된다. 데쿠파주의 기반이 되는 정교하게 계산된 상상선과 심도는 이제 헤드마운트디스플레이를 쓴 관람객의 자유로운 고개돌림으로 대체된다. 그렇다면 데쿠파주는 VR 영상에 이르러 드디어 완성된 것일까? 아니면 적어도 VR 영상에서는 완전히 쓸모없는 개념이 되고 만 것일까? 어떤 면에선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 초기영화(early cinema)가 편집을 활용한 영화적 공간의 창조와 관련해 겪었던 지각의 문제가 오늘날 VR 영상에서 반복되고 있는 셈이다. VR 기술이 몽타주를 통한 새로운 가상현실 공간의 창조라는 문제를 어떻게 돌파하느냐에 이 기술의 예술적 가능성이 걸려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VR 시대의 에이젠슈타인이라 불릴 만한 인물은 나타나지 않았다.”
---「오큘로 편집부, “A Critical Dictionary of Virtual Reality”, ‘Montage’」중에서
“VR이 우리에게 보여주려는 세계가 어떤 것인지에 대한 물음은 이 세계가 어떤 장소(정체성, 관계성, 역사성)와 접속되어 있으며 또 접속하려 하는지에 대한 물음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한 접속이 없이 오롯이 나름의 방식으로만 움직이는 곳은 ‘구역(zone)’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VR이 제공하는 세계란 구역일 뿐이라고 속단할 필요는 없다. 다만 지금은 이 세계의 성격을 두고 여전히 경합이 벌어지고 있는 중이며, 이때 ‘VR Experience Zone’과 같은 말은 이 세계에서의 주도권을 행사하려 드는 산업의 조급증이 낳은 모순어법이라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 왜냐하면 구역이란 오직 경험의 파괴만이 있는 곳을 가리키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오큘로 편집부, “A Critical Dictionary of Virtual Reality”, ‘Zone’」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