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어 왕』에 나오는 바보광대(Fool) 같은 어릿광대는 셰익스피어 작품에 종종 등장하는 전문 익살꾼이다. 유럽에서는 왕족이나 귀족 집안에 유흥을 위하여 고용된 어릿광대들이 있었다. 어릿광대들은 엘리자베스 1세도 고용했을 정도로 셰익스피어 시대에 사회적으로 용인된 존재였으며, 표현의 자유가 거의 무한정 부여된 존재였다. 그들은 단순히 농담으로 주인의 기분을 맞춰 주는 역할만 한 것이 아니라, 날카로운 기지와 유머로 주인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의 어리석음과 잘못을 꼬집어 내는 사회 비평가의 역할도 했다. 사회의 이면을 꿰뚫어 볼 줄 아는 능력을 지녔기 때문에 어릿광대 앞에 흔히 ‘현명하다(wise)’는 형용사를 붙이기도 한다.
그들은 연극 무대에도 종종 등장하여, 주요 등장인물들의 어리석음을 풍자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셰익스피어 작품에 나오는 대표적인 어릿광대로는 『십이야』의 ‘페스테(Feste)’와 『좋으실 대로』의 ‘터치스톤(Touchstone)’ 등을 들 수 있다.
익살꾼 역할을 하는 비슷한 인물 유형으로 광대(clown)도 있는데, 셰익스피어 시대 어릿광대와 광대는 거의 동의어처럼 쓰이기는 하였지만, 몇 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다. 어릿광대는 중심인물들의 사건에 밀접히 연루되어 있지만 광대는 다소 벗어나 있다. 따라서 광대의 익살은 중심 스토리에서 벗어나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않지만, 어릿광대의 익살은 다분히 의도적이고 훨씬 비판적이며 풍자적이다. --- p.49
리어 뒤늦은 후회의 비통함이여! 아! 공작, 왔는가?
이건 그대 뜻인가? 말해 봐라, 공작. 내 말을 준비해라.
배은망덕한 것, 목석같은 악마,
네년이 자식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 바다 괴물보다도
더 무섭구나.
올버니 폐하, 고정하시옵소서.
리어 (거너릴에게) 구역질나는 솔개 같은 년! 거짓말 마라.
내 수행원들은 엄선한 자들로
신하 된 자의 의무를 잘 알고
자신의 명예를 무엇보다 엄밀하게 지키는
사람들이다. 아, 지극히 작은 허물이여,
어찌하여 코딜리어에게서는 그리 추하게 보였느냐!
그것이 내 본성을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서
잡아떼어, 내 가슴에서 애정을 모조리 뽑아내고
미움만 심어 놓았다! 아, 리어, 리어, 리어여!
어리석음을 불러들이고 귀중한 분별력은 쫓아 버린
이 머리통을 부숴 버려라! --- p.96
에드먼드 군관 몇 사람은 포로들을 데려가라.
그들을 재판할 윗분들의 뜻을 알 때까지
잘 감시해라.
코딜리어 최선의 의도를 가졌으나 최악의 상황을
맞이한 게 우리가 처음은 아니옵니다.
탄압받는 폐하를 생각하면 너무 괴로우나, 저 혼자라면
못 믿을 운명의 여신의 찡그린 얼굴 따위 무색케 할 수 있습니다.
아버님 따님이자, 제 언니인 그들을 만나지 않으시겠습니까?
리어 아니, 아니, 아니, 아니다! 자, 감옥으로 가자.
우리 단 둘이서 새장 속 새처럼 노래 부르자.
네가 나에게 축복해 달라고 하면 나는 무릎을 꿇고
너에게 용서를 청하겠다. 그렇게 살면서
기도하고, 노래 부르고, 옛이야기를 하고, 금빛 나비같이
화려하게 차려입은 조신들을 비웃고, 비천한 자들이 궁중 소식을
지껄이는 걸 들어 보자. 또 그들과 이야기도 해 보자,
누가 권력을 잃고 잡았는지, 누가 총애를 받고 잃었는지,
그리고 마치 우리가 신들의 첩자인 양 알 수 없는 세상사를
알고 있는 척해 보자. 벽으로 둘러싸인 감옥 속에서
조류에 따라 흥하고 망하는 고관대작 패거리보다
오래 살자.
에드먼드 저들을 데려가라.
리어 코딜리어야, 우리 같은 제물에 대해서는
신들도 향을 피워 주실 게다. 내가 너를 잡고 있는 거지?
우리를 떼어 놓으려는 놈은 하늘에서 횃불을 가져와서
불을 놓아 여우 몰아내듯 우리를 몰아내야 할 것이다.
눈물을 닦아라. 좋은 시절이 와서 그것들을 살가죽까지
다 삼켜 버리기 전에는 그것들 때문에 울어선 안 된다.
먼저 그것들이 굶주려 죽는 꼴을 볼 것이다. --- p.230~231
『리어 왕』은 천륜이 무너지고 인륜이 사라진 미친 세상을 그리고 있습니다. 리어 왕의 두 딸 거너릴과 리건은 아버지의 권력과 재산을 분배받은 뒤에 늙고 힘없는 아버지를 박해합니다. 야심에 찬 글로스터 백작의 서자 에드먼드는 권력과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 형을 음해하여 쫓아내고, 리어 편을 드는 아버지도 리어의 둘째 딸 부부에게 밀고합니다. 리어의 두 딸은 유부녀이지만 젊은 야심가 에드먼드에게 반합니다. 큰딸은 에드먼드에게 자기 침대의 현 주인(남편인 올버니 공작)을 죽이고 자신의 침실을 차지해 달라고 종용합니다. 결국 동생에게 이 남자를 빼앗길 상황이 되자 질투심에 눈이 멀어 동생을 독살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추악한 범죄가 드러나자 자결합니다. 이렇게 이 극 속 많은 인물들은 권력과 재산에 눈이 멀고, 걷잡을 수 없는 욕망에 불타오릅니다. 부모 자식 간의, 형제자매 간의 천륜도, 부부간의 인륜도 욕망으로 인해 모두 사그라집니다.
이런 패륜과 금수 같은 행동들이 난무하는 미친 세상에서 사람들은 제정신으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딸들한테 버림받은 리어 왕은 폭풍우 속에 황야를 헤매면서 미쳐 가고, 동생의 모함으로 아버지 살해 시도라는 죄명으로 체포령이 내려진 에드거는 미친 거지 톰으로 변장하여 동냥하며 살아갑니다. 그들은 이 미친 세상을 반영하듯 휘몰아치는 폭풍우 속에서 황야를 헤매고 다닙니다. 그들이 황야에서 내뱉는 모든 대사들은 혼란으로 가득 찬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랩소디(광시곡)입니다. 그들의 대사는 얼핏 미친 자의 헛소리 같지만, 그 안에 세상과 인간에 대한 심오한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부조리한 세상의 면면에 대한 풍자가 숨어 있고, 인간의 본성에 대한 적나라한 해부도 엿보입니다.
--- p.252~2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