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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높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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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랑쇼 선집-10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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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9년 04월 10일
쪽수, 무게, 크기 448쪽 | 646g | 140*205*30mm
ISBN13 9788976824769
ISBN10 8976824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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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나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이 문구를 어떻게 잊겠는가?
병가(病暇) 중에 시내의 한 구역으로 산책을 나갔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도시인가, 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지하철로 내려가다 누군가와 부딪혔는데, 그가 거친 어조로 나를 불러세웠다. 나는 그에게 소리쳤다. “당신은 나를 겁줄 수 없어.” 그의 주먹이 매혹적일 정도로 빠르게 뻗쳐왔고, 나는 땅바닥에 쓰러졌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사내는 군중들 사이로 사라지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그가 분노에 차 항의하는 소리가 들렸다. “저자가 나를 밀쳤소. 나를 가만 내버려 둬요!” 아픈 곳은 없었으나, 내 모자는 물속에 뒹굴고 있었고, 내 얼굴은 필시 창백했을 것이며, 몸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나는 막 병에서 회복된 참이었다. 사람들은 내게 충격을 받으면 안 된다고 했었다). --- p.13

나는 복도를 따라 걸었다. 내 집으로 돌아온 후 방들의 불을 모조리 켰다. 나는 이날 하루에 관해 마치 내 여생 전체에 대해 그러듯 보고서를 작성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보고서, 다시 말해 간단한 일기. 사람들은 누구나 똑같이 법에 충실해야만 한다, 라는 생각은, 아! 나를 도취케 했다. 사람들은 그저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고 누구나 비천한 행위들을 저지르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숨겨진 존재들의 주위로 확산되는 건 빛의 훈영이었던 것이다. 자신과 전혀 다른 타자를 하나의 희망이자 놀라움으로 바라보며, 알았다는 발걸음으로 그를 향해 걸어가지 않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 p.43

우리가 회양목들을 따라 두 기념물 쪽으로 걸어 나가자 소궁전의 모습을 한 무덤은, 마치 이곳에서 죽음은 오직 여성성만을 지녔던 터라 우아함과 몽상뿐 아니라 배반과 범죄의 영속마저도 그것들을 담았던 웃음기 어린 생각과 완벽히 즐거운 마음의 양상하에 이뤄지게 하려고 애썼다는 듯, 젊고 상냥하고 거의 행복해 보이기까지 하는 장례의 교태를 살짝 부리며 빛났다. 반면 다른 편 무덤은 번뇌에 시달리는 검은 공허의 밑바닥으로부터, 적나라한 남성적 오만 속에서, 회한을, 거대한 규탄을, 귀 멀고 입 닫힌 돌의 원한을 끊임없이 쌓아 올리는 중이었다. 하계(下界)의 광기와 인내에 의해 서서히 낮을 향해 올려진 이 한 쌍의 무덤 앞에서 나는 루이즈가 이 두 과거의 화해를 일절 거부하며 땅 밑으로부터 자신을 향해 상냥하게 뻗쳐 오는 반지 낀 나긋나긋한 손을 증오심에 차 밟고 지날 것이며,
공포로 가득 차 저주를 내뱉는 어두운 쪽의 죽음을 향해서만 동정심을 느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 p.125

그리하여, 한 남자와 그의 누이를 닮은 어떤 여자가 한 몸처럼 함께 들어와, 안티고네 혹은 엘렉트라의 정념으로 국가의 법과 가족의 법을 맞붙였던 고대비극처럼, 흡사 끝나면 큰일 나는 의례적 코미디의 한 정경처럼, 앓는 백치와 간호사의 역할을 나누는 것이다. 근친상간의 금기에 아슬아슬하게 두 다리를 내려뜨리고 앉아 구덩이 속 오레스테스, 제 오라비를 걷어찼었나, 세상에서 가장 보이지 않는 여자의 형상을 한 채 해묵은 기억의 지하무덤으로 데려가 봉인된 가족의 폭력을 헤치곤(그런데 그 기원의 사건은 정말로 있었던 것일까) 기어이 죽은 아비의 환영을 끌고 올라오는 저 망할 누이인지 붉은 누더기인지를 닮은 여자가, 참으로 물색없는 사랑과 돌봄, 심지어 경배(adoration)의 맹세로서, 망각과 깨어남과 열광과 발작을 거듭하는 남자의 따귀를 때리고, 침을 뱉고, 욕을 퍼붓고, 아무도 봐서는 안 될 참지 못할 진실을 제가 유일하게 보았다고 우기며 마침내 총구를 겨눠 쏠 때에, 반복 속 변주를 통해 단속(斷續)되는 이 낮은 방향의 소란은, 여자가 열쇠처럼 쥔 총은, 과연 무엇을 주나.
--- p.436~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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