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일은 봄이 되면 컬럼비아 대학엘 가기로 했다. 헬렌의 도움이 있고, 파트타임으로 일하면 불가능할 것이 없었다. 40세이니 늦기는 하지만 대학교수가 되어 볼 목표를 세우고 한 편 소설을 쓸 꿈을 가꾸었다. 소설의 재료는 허드슨강이 얼마든지 제공해줄 것이었다.
신상일은 헬렌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시간적으로는 허드슨강을 거슬러 5백 년 전까지 가보는 스토리 하나, 공간적으로는 허드슨의 원류(源流)에까지 거슬러 오르며 지리학적 바탕에 인생을 섞어 쓴 스토리 하나, 상류에서 뉴욕으로 내려오며 더듬는 로맨틱 스토리 하나, 허드슨 강가에 사는 가난한 연인의 러브스토리 하나, 관광객의 시점에 의한 동서와 신구 대륙의 강을 비교하는 기행적(記行的) 스토리 하나. 이렇게 해서 합계 다섯 개로 된 스토리의 집대성(集大成), 그 제목은 더 스토리 오브 허드슨.”
헬렌은 눈을 반짝거리면서 듣곤, 돌연 얼굴을 흐리며 말했다.
“그렇게 해서 그게 베스트셀러가 되어 우리가 돈방석에 나앉게 되면 어떻게 하죠? 아아, 겁나!”
행복할 때의 헬렌의 모습은 한없이 우아하고 매력적이다. 그 동작 하나하나가 무용을 닮고, 단어 하나하나가 보석처럼 빛난다. 헬렌을 통해, 초등학교(初等學校)에서 배운 지식만으로도 창발력과 상상력이 보태지기만 하면 하나의 숙녀를 빛내고도 남음이 있는 광원(光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헬렌의 특질을 이룬 것은 유머 센스였다.
유머는 지옥을 천국으로 바꾸고 사(死)를 생(生)으로 돌이킬 순 없지만, 리버사이드의 암울한 방을 웃음의 꽃밭으로 만드는 기적은 낳는다. 허드슨강의 그 육중하고 초월적인 언어를 인간의 말로 번역하는 재질을 부여한다. --- p.315~316
나는 그 자리에 앉아 버번을 청했다. 이웃에서 말이 있었다.
“이제 당신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나간 사람이 누군질 아느냐?”
“알 까닭이 있느냐.”
고 답하고 그를 보았다. 호인으로 생긴 백인 청년이었다. 그 백인 청년은 웃으며 이와 같은 말을 했다.
“그 사람은 이 브로드웨이에선 제일가는 조명가요.”
“조명가가 그렇게 대단한가?”
했더니 그는 단번에 경멸하는 눈초리가 되었다.
“연극의 생명은 조명에 있는 거요. 조명이 없어봐요, 연극이 되는가. 그런 뜻에서 그는 브로드웨이 최고의 예술가란 말요.”
“태양이 제일 중요하다는 논리와 통하는군요.”
그는 내 말에 묻어 있는 빈정대는 투엔 아랑곳없이 그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곤 자기는 컬럼비아 대학교의 학생인데 아르바이트로 조명 조수 노릇을 하고 있지만 장차 본격적인 조명가가 될 것이란 기염을 토했다.
나는 이 집 옥호가 ‘제4막’인데 그 ‘제4막’이란 뜻이 뭣이겠느냐고 물었다. 그 청년의 설명은 친절했다.
“뮤지컬을 빼곤 브로드웨이에서 하는 연극은 대강 3막으로 끝나거든요. 그러니 제3막까진 극장에서 하고 제4막의 연극은 여기서 시작된다는 뜻이죠. 제3막까지의 무대에 등장하는 건 배우들이지만 이 제4막의 무대에 주역을 맡는 사람은 우리들이지. 조명가, 효과가, 대도구, 소도구 일을 말아보는 우리들이란 말요. 이를테면 진짜 연극은 이 제4막에 있는 것 아니겠소?”
윌리엄 사로얀을 가장 존경한다는 그 청년은 아르메니아계의 인종이었다. 나는 그날 밤 그 청년과 더불어 기분 좋게 취했다. 우선 그 ‘제4막’이란 이름에 취했다.
--- p.376~377 이 책에 수록된 장편 『허드슨 강이 말하는 강변 이야기』와 단편 「제4막」은 이병주 소설 가운데 뉴욕이라는 거대 도시를 직접적인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작가 자신이 꽤 오랜 뉴욕 체류 경험을 가지고 있고, 이 세계 최대의 도시가 가진 속성과 그 가운데서의 인간 군상을 여러 모로 목도한 사실이 이 작품들을 창작하게 한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그의 전체 작품세계를 관류하여 살펴보면 창작이 지속될수록 그 무대를 점진적으로 확대해 가는 형용을 볼 수 있다. H읍이라는 이름으로 표기된 향리 하동, C시라는 이름으로 표기된 일시 거주지 진주, P시라는 이름으로 표기된 부산을 넘어 일본, 동남아, 미국, 유럽 등 종횡무진의 지경으로 내닫는다. 동시에 박학다식과 박람강기를 자랑하는 문학적 호활(豪活)을 자신의 전매특허처럼 과시한다.
그와 같이 범주가 넓고 규모가 큰 서사적 형상력 속에서 중심인물 또한 기구한 운명과 맞서서 온갖 간난신고를 헤쳐 나가는 모습을 보인다. 『허드슨 강이 말하는 강변 이야기』의 신상일이 하나의 표본이다. 일찍이 이 작가가 데뷔작 「소설·알렉산드리아」에서 선보인 기상천외한 이야기와 그것이 유발하는 재미가 여기에서도 유사하다. 이 서사성의 확장과 증폭이 가능하자면 중심인물이 일반적이고 선량한 캐릭터로 출발하는 것이 보다 효율적이다. 그러한 측면은 「제4막」의 주인공 ‘나’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뉴욕이라는 소설의 무대가 천의무봉의 필력을 행사하는 작가와 만나고, 그것이 대중적 수용성이라는 방향성과 결합한 곳에 이 작품들이 놓여 있다. 그러할 때 등장인물들의 고통조차 가치 있게 느껴진다. 작가는 「제4막」의 말미에서 “이런데도 뉴욕에 애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한다.
--- p.358~3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