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 서핑을 하다보면 의도치 않게 어떤 글을 보게 될 때가 있다. 너무 멀리 왔을 땐 처음의 목적을 잊고 부유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날도 어떤 카테고리로 시작해서 보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없다. 분명한 것은 고전도 단테도 전제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베아트리체가 실존 인물인지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도 있다는 글에서 ‘픽’ 실소하다가 순간 나는 내 느낌이 과연 합당한 것인지,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인지 의구심이 생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베아트리체의 실체를 직접 확인한 적은 없었다. 아니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다. 마치 오래된 고전이 너무나 익숙해서 이미 읽었다고 느끼는 것과 같은 이치랄까.
인터넷의 인물 정보에서 검색이 되지만 사실과 다른 이야기들이 얼마든지 떠돌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나의 의심에 답을 줄 단테의 전기를 찾는 일이다. 그나마 아직까지는 신뢰할 수 있는 매체가 책이라는 작은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부르크하르트는 그의 저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에서 유명인의 전기 총서가 14세기에 등장했고 당대인이 아니면 당연히 과거 전기 작가의 글에 의존했으며 ‘독자적으로 써진 최초의 전기는 보카치오의 『단테전』일 것이다. 경쾌하고 생동감 넘치는 필치를 보여주는’ 이라고 적고 있다.
『단테의 일생』은 1370년경 조반니 보카치오가 단테에 대해 쓴 최초의 전기 『단테전』의 영어번역본이다. 처음에는 ‘단테를 찬양하는 짧은 수필’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고, 단테가 고향 피렌체에서 추방되고 타지를 떠돌다 라벤나에 묻힌 지 50년이 지난 시점이다. 단테는 간절히 원했지만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저자는 서문에서 고향 피렌체는 단테라는 이름의 가치를 반드시 알아야만 하고, 정부는 그의 활동들이 어떠했는지 분명하게 살펴보고 충분히 보상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책은 서문을 시작으로 제17장 ‘단테 어머니의 꿈에 대한 설명과 결론’까지 모두 열일곱 편으로 구성되었다. 저자는 단테의 딸 베아트리체와 단테의 가까운 친구, 그리고 베아트리체 포르티나리의 친척과도 친분이 있었기에 아마도 단테의 삶에 대해 사실을 그대로 잘 반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단테 어머니의 태몽이나, 베아트리체를 잃고 슬퍼하는 단테의 모습과 그의 결혼이야기는 매우 자세하다. 또한 정쟁에 휘말려 추방당한 뒤 가족의 상태가 어떠했는지, 외모와 습관, 어쩌면 결점으로 보일 수 있는 분노하는 행동까지도 숨김없이 적고 있다. 전기가 가지는 사실 그대로의 정직성은 독자에게 ‘바른 설득력’으로 작용한다. 객관성을 잃지 않는 것이야말로 전기 작가를 전적으로 신뢰하게 만드는 요소가 아닐까.
단테 알리기에리(1265~1321)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마을에는 5월 1일이면 사람들을 집으로 불러 축제를 여는 관습이 있었고, 아홉 살 난 단테는 포르티나리의 집에서 열린 잔치에서 자신보다 한 살 어린 그의 딸 비체를 보았다. 조숙하고 참 예쁘게 생겼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녀는 24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 마음의 고통으로 자신을 돌보지 않아 모습은 초라하였다. 마르고 면도도 안 하여 예전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다.” 단테는 손 한번 잡아본 적 없는 그녀에게서 평생 창작의 영감을 받았고, 그녀를 향한 사랑의 시와 산문은 『새로운 인생』으로 남겨졌다.
특히, 그의 인생이 녹아있는 자서전이라 해도 될 만한『신곡』은 무려 20년에 걸쳐 구상되고 완성된 운문 형식의 글이다. 그 당시 공용어인 라틴어 대신, 단테는 『신곡』을 피렌체의 일상어로 섰다. 그 이유는 일반교양이라고 생각하는 시가 어려운 말로 쓰여 신성한 버질의 작품마저도 대중들로부터 무시당하는 것을 보기도 했지만, 첫째로는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보일 것이며, 배우지 못한 사람에게 이해하는 기쁨을 주리라”는 것이다. 마치 세종대왕이 백성들을 위해 한글을 만든 이유처럼 들린다. (물론 한글과 이탈리아어의 위상이 같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전개되면 사라져버리는 음성 언어의 약점을 보완해 ‘멀리 그리고 오래’ 전달되기 위해 발달한 문화가 문자 언어다. 문자 언어의 지속성은 읽기와 쓰기를 통해서 가능해 진다. 피렌체 사람들을 위해 쉬운 말로 써진 단테의『신곡』은 피렌체 방언이 문자로서 제 갈 길을 가게 만든 시초이며, 피렌체를 중심으로 하는 토스카나지방의 방언이 오늘날 이탈리아어의 표준어가 된 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단테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다.
저자 조반니 보카치오(1313~1375)는 스승으로부터 단테의 이야기를 듣고 존경심을 가지게 되어 말년에 그의 전기를 집필하고 『신곡』을 강의하였다. 그 역시 피렌체 출신의 인문학자로 피렌체 방언으로 소설 『데카메론』을 썼다. 『신곡』이 운문의 본이라면 『데카메론』은 산문의 본보기다. 1348년 피렌체에 불어 닥친 페스트로 시민의 70%가 죽음으로 내몰렸다. 간신히 전염병을 피해 교외로 달아난 일곱 명의 귀부인과 세 명의 청년은 별장으로 숨어들어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하루에 한 가지씩 주제를 정해 자신이 아는 재미난 이야기를 하기로 한다. 하루 10가지의 이야기를 10일 동안 하게 되어 그리스어로 10일간의 이야기, 데카(10) 메론(이야기)이다.
『단테의 일생』이 아쉬운 것은 하느님이라는 보편타당한 단어 대신 하나님이라는 개신교의 특정 언어로 출판되었다는 것이다. 억지를 부려 본다면, 책은 전기문이고 그 시절 보카치오가 하나님이라 말했을 리도 만무하니 객관성의 결여라 할 만 하다. 하나님이 실수인지 의도인지 필자로서는 알 길이 없다. 다만 ‘멀리 그리고 오래’ 전달되는 것이 문자의 일이라면, 혹시라도 일반 독자에게 나아가는 한걸음을 방해하게 될까? 그 발목을 잡는 것이 아닐까 우려된다.
---「나라말싸미 문자와 달라!, 우은희」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