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인은 질질 끌려가다 하진의 손에서 자신의 손목을 비틀어서 뺐다. 갑자기 걸음이 멈춰지는 덕분에 그가 그녀를 바라봤다.
"왜, 일학년 걔랑 더 놀지! 여기 왜 왔냐!"
하진이 그녀의 고함에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아주 배까지 부여잡고 웃었다. 혜인의 이마에서 스멀스멀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며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자존심 상했다. 차라리 멋진 놈하고 앉아 있었으면 몰라도 오징어와 앉아 있었고 거기다 저놈은 자신을 비웃었다.
혜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지러지게 웃고 있는 그를 버리고 앞만 보고 걸어갔다. 저놈하고 다시 엮인다면 자신은 사람이 아니었다.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내고 꿋꿋하게 걸었다. 혜인은 눈물을 애써 참으려 애꿎은 입술만 잘근 잘근 깨물었다.
"야, 어디 가."
무시했다.
"어디 가냐니까. 나, 너 한 시간 동안 찾아 다녔다?"
또 무시했다. 하진이 자신의 옆에서 느긋하게 걸어가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우리 서혜인이 삐쳤나 봐?"
혜인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뭐? 삐쳐? 됐어! 됐다고. 너 필요 없어! 너보다 오징어 대가리가 훨씬 나아!"
이곳은 번화가다 보니 유동인구가 참 많았다. 사람들 때문에 어깨가 밀리고 몸이 밀쳐졌지만 혜인은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소리쳤다. 하진은 그녀를 보고 씨익 웃더니 혜인의 머리 위에 큼지막한 손을 올려놨다. 몇 번이고 치우고 해도 몇 번이고 머리 위로 돌아왔다.
"질투야?"
"아니야!"
"근데 왜 화를 내? 그 여자애랑 같이 있는 거 싫지?"
혜인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분명 싫은데 똑바로 말하기 싫은 이 기분은 뭘까?
"말해봐. 싫어?"
"싫어……."
"왜 싫은데?"
분명 목소리에 장난기가 가득 묻어났지만 하진의 눈빛이 그 무엇보다 진지했다. 무언가 즐거워 보이기도 했지만 혜인은 이유를 알지 못했다.
"걔, 걔가 엄청 심한 바람둥이래!"
"서혜인이 그런 소문 믿는 애였던가?"
혜인은 순간 온몸이 빳빳한 나무토막처럼 경직돼 움직일 수가 없었다. 너무 날카롭게 파고들어오는 하진의 말에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소문 따위 관심 없어 하고, 신경도 쓰지 않았다. 소문이란 것은 실제라 맞지 않는 것도 꽤 많았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냐 하지만 진짜 연기가 나더라. 혜인 자신이 뼈저리게 몇 년 동안 보고 듣고 겪은 것들이었다.
"자, 서혜인. 잘 생각해봐. 걔랑 나랑 같이 있으면 기분이 어때?"
"그건 왜 묻는데?"
말이 생각보다 더 퉁명스럽게 튀어나갔다. 스무고개같이 이것저것 캐묻는 하진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솔직하게 대답하면 내 근처에 다시는 얼씬도 못하게 할게. 자, 말해봐. 기분이 어때?"
"나빠……."
"어떻게 나쁜데?"
"그냥! 그냥 나빠! 네가 걔한테 웃어 주는 것도 싫고, 그게 네 팔짱 끼는 것도 싫어! 기분 나빠!"
혜인이 속마음을 속사포처럼 말하자, 하진은 시원스럽게 웃음을 터트렸다. 혜인은 순간 멈칫거렸다. 지금 자신이 무슨 얘기를 터트린 건가, 혜인은 그 자리에서 한참을 생각해야 했다. 자신이 내뱉은 이야기를 되새김질하는 속에서 한 가지씩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혜인의 온몸은 열기로 채워졌다. 나중에는 온몸이 뙤약볕에 하루 종일 있던 것처럼 화끈거리고,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처럼 따끔거리기까지 했다. 자신이 한 행동은 좋아하는 남자한테 하는 질투가 분명했다. 아무리 연애를 못해본 그녀라지만 자신이 보아도 그것이 확실했다. 머리가 어질했다.
하진은 휘청거리는 혜인을 어깨를 부드럽게 잡았다. 하진을 마주본 혜인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하진의 눈망울이 너무 깊고 그윽해 보였기 때문이다. 강한 충격도 잊어버릴 만큼 그 눈동자가 깊게 일렁거렸다.
"혜인아, 서혜인아."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하진의 목소리가 듣기가 좋았다. 항상 싫어했던 하진이었지만 오늘만큼은 목소리가 더 감미롭고 달콤하게 들려왔다.
"오빠가 그렇게 좋냐?"
"뭐……?"
머리를 망치로 때린 것처럼 강한 충격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혜인의 손목에서 강한 힘이 느껴지며 코끝에 시원한 향이 스며들었다. 몸 안에서 열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이렇게 둔해서야, 이걸 어떻게 데리고 사나……."
혜인은 눈만 깜빡거렸다. 하진에게 여자친구 비스무리한 게 생겼을 때도 이런 느낌이었다. 하원이 여자를 밥 먹듯이 갈아치워도 별 상관 않았던 그녀가 하진에게는 하루 종일 삐쳐서 말도 하지 않았었다. 덕분에 그 다음날 그 여자는 깨끗하게 차였다. 그때 얼마나 신이 나고 좋던지, 유하진에게 며칠 동안 잘해줬던 기억이 난다. 설마 자신이 유하진을 좋아한단 말인가? 그렇게 싫어하던 유하진을……? 하나씩 되짚어 나갈 때마다 무언가 돼먹지도 않은 자존심이 슬금슬금 상했다. 혜인은 하진의 가슴을 강하게 밀쳐내고 노려봤다. 하진은 그걸 모르는지 그저 생글생글 미소만 지어댔다.
"이제 좀 알겠냐, 둔탱아?"
"야, 야, 잠깐만, 그럼 너는……?"
"나는 뭐?"
"그래. 내가 널 조, 좋아하는 거 같은데, 너는……?"
멀찍이 밀려난 하진이 그녀를 다시 품에 안았다. 심장의 요동침이 고스란히 들릴 만큼 더 세게 안았다. 맞닿은 곳에서 똑같이 움직이는 심장이 느껴졌다. 키가 큰 하진이 고개를 약간 숙이며 그녀의 귓가에 뜨거운 숨결이 내려앉았다.
"넌 너무 눈치가 없어. 여태껏 내가 할 짓 없어서 너랑 항상 붙어 다녔겠냐?"
"뭐……?"
"너를 좋아하니까 그랬겠지. 아니. 사랑한다, 서혜인."
혜인은 하진의 말에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유하진의 고백. 그리고 자신의 마음. 이것이 말이 되는 일인가 말이다. 그럼에도 그의 고백이 싫지 않고 오히려 기쁘게 느껴졌다. 오랜 달리기를 한 것처럼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두근거림과 설렘이 공존하는 낯선 감정이 거센 파도처럼 몸 안에서 일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온몸의 신경과 작은 감각까지 모두 한곳으로 집중됐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