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며칠간 얼마나 불행한 일들이 일어났던가! 우선 ‘괜찮군!’을 잃었다. 그것만으로도 불행하기 짝이 없는데, 밀수꾼에 살인범 누명까지 뒤집어쓰게 됐다. 그게 두 번째 불행이고, 세 번째이자 마지막 불행은 내 다리가 부러진 탓에 도망치기가 어려워진 것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또렷하게 내 눈앞에 떠오른 것은 아침 해를 배경으로 하늘을 쳐다보고 있던 그 잿빛 얼굴이었다. 이 사실을 그레이스가 알게 되면 어떻게 될지를 생각하자, 원수인 그를 되살릴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라도 내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 p.167
나는 글레니 신부님한테 들은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았다. 사람들이 ‘검은수염’이라고 부르는 존 무훈 대령은 젊은 시절부터 낭비가 심했고, 방탕한 생활로 전 재산을 탕진했다. 급기야 마지막 궁지에 몰리자 왕당파에서 반역자로 변신하여, 캐리스브룩성에 갇힌 왕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왕관에 장식된 다이아몬드 한 개를 뇌물로 받고 왕을 풀어주기로 했다. 그런데 보석을 손에 넣자 그는 다시 배반을 저질러 왕의 방으로 병사들을 안내했다. 감방에 들어간 병사들은 탈출하려다 창살 틈새에 끼어 있는 왕을 발견했다.
그 후로는 아무도 ‘검은수염’을 믿지 않았고, 그는 결국 지위를 잃고 빈털터리로 문플릿에 돌아왔다. 그는 빈둥거리며 세월을 보냈지만, 죽을 때가 가까워지자 두려움에 차서 위안을 얻기 위해 성직자를 불렀다. 신부님의 권고에 따라 유언장을 만들고, 그의 유일한 유산인 다이아몬드를 문플릿의 무훈 구빈원에 남겼다. 이 구빈원은 그가 빼앗아 폐허로 만든 건물이었다. 게다가 구빈원은 그의 유언으로 전혀 이익을 얻지 못했다. 유언장이 개봉되었을 때, 구빈원에 유산을 준다는 말은 분명히 쓰여 있었지만 보석이 어디 있는지는 한마디도 없었기 때문이다. --- p.215~16
“얘야, 나는 사람들이 온갖 이유로 목숨을 건다는 걸 알고 있다. 황금이나 사랑, 증오 같은 이유로 말이지. 하지만 나무나 시내나 돌멩이 따위를 보려고 목숨을 걸겠다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누가 어떤 장소나 마을을 사랑한다고 말하면, 사실은 그 장소가 아니라 그곳에 사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뜻이겠지. 그래서 추억을 떠올리기 위해 그곳을 다시 보고 싶어 하는 거야.” --- p.223
나는 그를 마주 보지 못하고 눈길을 피했다. 아무래도 다이아몬드를 놓아줄 마음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엘저비어의 말이 맞다고 느꼈고, 글레니 신부님의 설교가 생각났다. 인생은 Y자와 같아서, 살다 보면 누구나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목에 다다르게 마련이고, 그러면 넓고 완만한 길을 갈 것인지 아니면 좁고 가파른 길로 갈 것인지,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는 설교였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나는 오래전에 넓은 길을 택했고, 지금은 그 사악한 보물을 찾아 그 길을 계속 내려가고 있었다. --- p.291
나는 엘저비어가 내 목숨을 구해주었고 몇 주 동안 나를 보살폈으며, 상황이 나빠질 때도 내 곁을 떠나지 않고 도와주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그 친절한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탁자 앞에 앉아 있던 노인이 일어나더니 방 뒤쪽 벽장에서 작은 철제 상자를 꺼냈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내 보물을 그 상자에 넣고 자물쇠를 채우리라는 것, 그러면 나는 내 보물을 두 번 다시 보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탁자 위에 외따로 놓여 있는 그 커다란 다이아몬드는 스무 개도 넘는 촛불 빛 속에서 반짝반짝 빛을 내면서 나에게 외쳤다.
‘나는 이 세상 모든 다이아몬드의 여왕이 아니냐? 나는 너의 다이아몬드가 아니냐? 이 천박한 도둑놈의 손에서 나를 구해다오.’ --- p.301
“그 보물에 손을 댈 때는 조심해. 사악한 수단으로 손에 넣은 거니까 저주가 따라다닐 거야.”
모든 것은 바로 그 다이아몬드가 한 짓이었다. 내가 문플릿 교회의 납골당에서 보낸 그날 밤부터 내 인생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 것은 그 다이아몬드였다. 나는 그 보석을 저주했고, ‘검은수염’과 무훈가를 저주했다. 그리고 내 얼굴에 그들의 문장을 낙인으로 새긴 채 험한 길을 터덜터덜 걸어갔다. --- p.314
깊은 슬픔에 대해 말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피곤하게 하는 일이다. 게다가 그 슬픔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었다. 아무리 현명한 사람의 말이라 해도 그 슬픔을 표현하기에는 부족했다. 설령 그 슬픔을 말로 표현할 수 있다 해도, 우리의 기억은 거기에 대해 말하는 것을 참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그 무서운 충격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이 말만 해두겠다. 사람들은 내가 낙담했을 거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슬픔은 나를 낙담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나에게 힘을 주었다. --- p.341~42
이제는 기쁨도 슬픔도 알지 못할 이 말없는 형체가 죽은 아들 위에 엎드려 흐느꼈던 것도 이 탁자였다. 방은 몇 년 전 4월의 어느 날 저녁에 우리가 이곳을 떠났을 때와 똑같았다. 천장 위에는 커다란 주사위 놀이판이 놓여 있었는데, 먼지가 너무 많이 쌓여서 거기에 적힌 격언-‘인생은 도박과도 같다. 솜씨 좋은 노름꾼은 최악의 끗수도 활용할 것이다’-도 읽을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우리는 얼마나 서투른 노름꾼이었는가! 우리의 끗수는 얼마나 나빴는가!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얼마나 활용하지 못했는가!
--- p.350~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