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 개념
House의 오리지널 번역품질평가 모델(1977, 2nd ed. 1981)은 언어 사용 이론을 기반으로 한다. 본 모델의 고안 목적은 첫째, 원문과 번역문의 언어적·담화적 특이점뿐 아니라 상황적·문화적 특이점들을 분석하고 둘째, 원문과 번역문을 원칙에 따라 비교하며 셋째, 원문과 번역문이 상대적으로 얼마나 비슷한지 검정하기 위함이다. 절충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이 오리지널 모델은 화용론, Halliday의 체계 기능주의 언어학, 프라하학파의 언어 및 언어학에 대한 기본 틀에서 발전한 개념들, 사용역 이론, 문체론, 담화 분석 등에 기반을 둔다.
또한 1장에서 논의한 등가라는 개념에 확고하게 바탕을 두고 있다. 필자가 앞서도 강조했듯이 등가는 번역품질평가에서 핵심적인 개념이다. 또한 이 오리지널 모델은 번역을 원래 다른 언어로 생산된 어떤 텍스트에 대한 (비교 가능한) ‘재생산물’ 이라고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에도 기반을 둔다. 어떤 의미에서는 번역이 딜레마를 이루는 관계에 있다는 관념을 정당화하는 것이 바로 번역을 정의내리는 일반적인 관점이다. 번역문은 두 가지 면에서 제약을 받는 텍스트다. 한 손에는 원문 텍스트가 다른 한 손에는 (잠재적인) 수용자의 의사소통 환경이 들려 있는 셈이다. 이러한 이중결합은 번역의 ‘등가 관계’, 즉 2장에서 논의했던 원문과 번역문 간 관계의 기반이다.
또한 등가라는 관념은 두 언어 문화권 내에 존재하는 ‘의미’의 보존과도 관련이 있다. 의미가 가지고 있는 측면 중 번역과 연관된 측면은 바로 의미론적(semantic) 측면, 화용적(pragmatic) 측면, 텍스트적(textual) 측면이다. 이제 이 세 가지 측면에 대해 설명할까 한다.
의미론적 측면은 지시(reference) 혹은 외연(denotation)과의 관계, 즉 가능 세계(possible world)에서 언어 단위나 언어 기호와 그에 해당하는 지시 대상과의 관계를 의미하며, 가능 세계란 사람의 마음으로 구상할 수 있는 모든 세계를 말한다. 여기에서 경험 세계(즉, ‘가능 세계’에 대한 주관적인 해석)의 특성은 대부분의 언어 문화권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며, 의미에서 지시적 측면 역시 번역 등가를 이루고 있는지 여부를 가장 손쉽게 파악할 수 있고 가장 활용하기 쉬운 수단이다.
기호와 지시대상물(designate) 간 관계와 ‘단어’와 ‘사물’ 간 관계를 조사하고 이론적 구성체로서의 문장이 가지고 있는 요소들을 다루어야 할 문제로 인식하는 의미론적 측면과는 달리 화용적 측면에서는 문장이 사용되는 목적 및 효과를 살펴보고 발화로서의 문장이 적절하게 사용될 수 있는 실제 상황이나 맥락을 알아본다. 그러므로 화용론은 주어진 의사소통 상황하에서의 언어 단위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과의 상관관계와 관련이 있다. 문장 ‘바깥’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행위 내에서만 그 의미가 분명해지므로 화용론에서는 발화 상황에서의 의미를 다루며 화자와 청자 사이의 의미, 발화의 맥락, 발화의 잠재적 의미를 조율해가는 역동적인 절차로 구현되는 의미를 다룬다. 또한 화용적 의미란 담화, 즉 사회적 행위를 수반하면서 발생하는 발화에 속한다고도 볼 수 있다.
Austin(1962)과 Searle(1969)이 처음 도입한 화행이론도 의미론적 의미와 화용적 의미를 구분하는 것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여기에서 화용적 의미란 발화가 가지고 있는 발화수반력(illocutionary force)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구체적인 경우에 사용되는 특정한 표현임을 뜻한다. 발화가 가지고 있는 발화수반력은 명제 내용(propositional content), 즉 발화에 내포되어 있는 의미론적 정보와는 구별된다. 이러한 발화수반력은 어순, 동사의 법, 강세, 억양, 수행동사(performative verbs)의 유무 등과 같은 문법적 특징을 통해 유추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 발화 상황에서 발화수반력을 명확하게 해 주는 것은 바로 맥락이다.
번역은 실제 사용되고 있는 언어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발화수반력이나 화용적 의미를 고려해서 번역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사실상 번역은 문장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발화, 즉 의사소통을 할 때 문장들이 가지고 있는 사용가치에 의해 만들어진 담화 단위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특정 번역의 경우 의미론적 의미를 배제하고 화용적 의미 측면에서 등가를 이루도록 하는 것이 가능하기도 하고 필요하기도 하다. 그렇게 되면 화용적 의미가 의미론적 의미에 앞서게 되고, 이 경우 번역문이 원문을 화용적 의미 위주로 재구성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번역에서 등가를 유지해야 하는 의미를 이야기할 때 텍스트적 측면은 이미 Catford(1965)가 강조한 바 있다. 그는 번역이 텍스트적 현상이 될 수도 있다고 예전부터 생각해 왔다. 그렇다면 텍스트는 무엇인가? 텍스트란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이 상호 연관되어 일관성 있는 완전체를 이루는 언어의 연장선상에 있는 존재다. 따라서 텍스트란 문장들이 좀 더 큰 단위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 텍스트가 구성되는 과정에서 테마-레마 구조, 대용형(pro-form)의 존재, 대치(substitution), 동일지시어(co-reference), 생략, 대용(anaphora) 등 맥락적 지시의 다양한 관계들이 발생한다. 번역 시 등가가 유지되어야 하는 텍스트적 의미는 이와 같이 다양한 텍스트 구성 방법에 의해 결정된다.
번역과 관련된 세 가지 측면의 의미를 통해 번역에 대한 잠정적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릴 수 있다. 번역이란 출발어로 쓰여 있는 텍스트를 의미론적?화용적으로 등가를 이루는 텍스트로 대체하는 것이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등가는 번역 품질을 정하는 기본적인 기준이기 때문에 충분한 번역이라면 화용적으로도 의미론적으로도 등가를 이루고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한 우선 요건은 번역문의 기능이 원문의 기능과 동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5장에서 언급될 부분이긴 하지만 이러한 요건은 외현적 번역과 내현적 번역 사이에서 어느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더 세부적으로 구분되어야 한다. 기능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는 것은 적절한 분석 도구만 주어진다면 텍스트 기능을 밝힐 수 있는 요소가 텍스트 내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이 책에서 ‘개별적 텍스트 기능’ 내에도 여러 가지 언어적 기능이 공존할 수 있는데다 언어 기능이 종종 텍스트 유형과도 관련이 있기 때문에 '기능(func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전에 정확한 정의를 내려야 한다. 이제부터 필자의 모델에 필수적인 텍스트 기능이라는 관념을 언어 기능과 구분하기 위해 다양한 ‘언어 기능’들을 살펴볼 것이다.
---「House의 오리지널 번역품질평가 모델(1977)」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