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기 어려운데, 달인으로 표창을 받아 매스컴에도 소개된 어느 안전관리자는 회사에서 산재가 발생했을 때 웬만한 것은 산재로 처리하지 않는다는 놀라운 말을 하고 있다. 공상처리 한다는 것이다. 그가 안전관리 책임자로 일하는 곳은 이름만 대면 누구라도 알 만한 대기업이다. --- p.25
경기하강기와 대비해 경기상승기에 산업재해가 증가하는 현상은 기업 차원의 분석으로도 금방 이해할 수 있다. 기업은 제품이나 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늘면, 즉 경기가 좋아지면 바로 종업원을 더 고용하는 것이 아니라(종업원의 고용에는 직간접적인 비용이 많이 수반된다), ① 현재 고용되어 있는 근로자들의 노동 강도를 높이거나(1시간에 10개의 제품을 생산하던 것을 12개 생산하는 것으로 목표를 높인다), 그래도 안 되면 ② 근로자들의 노동 시간을 늘리거나(하루 8시간 근무에서 9시간 근무로 늘린다), 그래도 안 되면 ③ 신규로 근로자를 더 채용한다.
이러한 세 가지 과정은 모두 재해발생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다. 높은 노동강도와 장시간 근로가 재해발생의 가능성을 높이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고, 채용 후 6개월 이내인 근로자들에게서 재해발생 빈도가 높은 것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경기하강기에는 이와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나서 산업재해가 감소한다. --- p.27
삼성전자 보상공고문을 보면 질병이 생긴 근로자와 유가족에 대한 요양과 보상 내용·방법이 산재보험을 따르고 있다. 산재보험법상의 용어인 ‘요양급여’ 대신 ‘요양비’, ‘휴업급여’ 대신 ‘위로금’, ‘유족급여’ 대신 ‘사망위로금’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으며, 산재보험처럼 평균임금의 70%를 기초로 계산하고 있다. 그런데 보상공고문에는 회사가 요양비 및 위로금 등을 지급하는 행위는 ‘근무환경과 질병 간의 인과관계와 무관하게 관련 임직원 또는 유족들에 대한 사회적 부조차원에서 실시되는 것’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쉽게 말하면,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했기 때문에 백혈병 등에 걸렸다고 주장하지만, 정말 그런 건지 우리는 모른다. 단지 우리 회사에 근무한 인연이 있으니 돕는 차원에서 요양경비와 위로금을 준다’라는 것이다. 법적으로 책임져야 할 수준의 보상은 하면서도, 질병발생의 법적 책임시비에서는 탈출해버린 것이다.
삼성전자는 이렇듯 피해 근로자의 보상받을 법적 권리는 인정하지 않고 요양비, 위로금 따위를 사회부조 명목으로 지급하면서, 피해자의 질병이 회사의 안전하지 않은 공정 때문에 발생한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 pp.46~47
산재은폐의 진정 심각한 근본적인 문제는 그것이 부정확한 산재통계로 이어져 부실한 정책을 낳는다는 것이다. 또한 산업재해 실상이 드러나지 않아 사고 내용과 정도를 알 수 없게 되고 그 심각성이 희석되므로 사회적, 기업적 차원에서 무관심을 낳아 재해가 반복되기 쉽다. 이는 결국 더 많은 근로자가 산재를 당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 p.81
산재은폐는 피재 근로자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다. 속성상 기업 주도로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즉, 기업 입장에서는 산재은폐로 발생하는 경제적 이익과 손실을 비교하게 되는데, 산재은폐를 할 때 이익은 크게 되고 손실은 거의 없는 작금의 구조를 바꿔야 한다. 산재은폐의 유인을 없애야 하는 것이다. --- p.84
‘산재 발생의 실상파악과 그에 상응하는 기업 및 정부의 대책 수립’이라는 산재보고의 취지는 사업주가 산재발생 사실을 감추지 않고 그 내용을 정확하게 보고해야만 달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망이나 이에 준하는 산재사고가 아닌 한, 산재보고라는 법적인 의무를 성실하게 이행한 데 대해 사후적으로 실시하는 조사 및 그 후속조치는 필요한 최소한에 그쳐야 하며, 특히 징벌적으로 행해져서는 안 된다. 정부공사 계약에서 사전심사(PQ)에 산재발생 정도를 반영하는 제도 또한 획기적으로 개선해야 한다.4 이러한 두 가지가 시정되지 않는다면 산재은폐는 근절되기 어렵다. --- p.85
「산업안전보건법」은 개괄적으로 말하면, 근로자의 안전과 건강을 위해 사업주가 취해야 할 안전조치와 보건조치를 규정한 법으로서, 그 같은 조치를 취하지 않아 사고가 발생한 경우 처벌을 한다는 내용이다. 규범적으로는 안전 보건상의 조치를 취하지 않은 그 자체가 처벌의 대상이지만,3 실제로는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결과로 안전 또는 보건상의 문제가 발생했을 때, 즉 사고가 일어나 근로자가 다치거나 사망한 경우에 처벌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 p.92
안전 전문가들이 안전 문제를 논할 때 가끔 ‘안전의 경제적 가치’라는 말을 하고는 한다. 안전이라는 용어는 추상명사여서 그것을 경제적으로, 화폐 가치로 표현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안전(safety)이란 안전한 상태를 말한다. 보건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사고로부터의 보호(또는 사고를 당하지 않는 것), 건강이나 경제적 손실을 초래할 그 무엇에 노출되어도 아무런 피해가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안전을 돈으로 따지면 얼마인가라는 것은 몹시 모호한 질문이 된다. 다시 말하면 안전사고 및 보건사고로 인간 생명과 신체가 손해를 입었을 때 그 값이 얼마인가라는 것인데, 인간의 목숨이 경제적으로 얼마인가 하는 우울한 문제가 내재되어 있다.1 --- p.228
안전의 경제적 가치는 ① 안전을 위해 사전 대비를 하지 않아 일어난 사고가 초래한 최대피해액을 최고값(소극적 의미에서 안전의 경제적 가치)으로 하고, ② 완전한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투자가 이루어졌을 때(그 결과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을 때)의 투입액을 최저값으로 해서 계산해야 할 것이다. --- pp.233~234
실무 차원의 몇몇 저작들은 무재해 또는 근로손실일수 제로(zero)를 보고한 조직에서 나타나는 재해감소사례를 모델로 하여 안전문화를 설명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들은 무재해를 목표로 추켜세우거나 안전문화로 휘몰아가기 위해 ‘안전제일’을 구호로 내세운다. 그들은 또 조직을 안전목표로 향하도록 이끄는 데 경영진의 리더십이 매우 중요하다고 추켜세운다. 특정 프로그램이나 경영기법을 사용해 우수한 안전성과를 보인 조직을 예로 들기도 한다. 성공한 조직을 모방하기만 하면 성공한다고 믿는 것 같다.
모방을 통해 우수한 안전문화를 달성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참 곤란한 사고방식이다. 한 개인도 다른 성공한 개인을 무조건 모방한다고 성공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듯이, 조직도 성공적인 안전 성과를 달성한 다른 조직을 모방한다고 같은 결과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 pp.275~2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