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오는 짧게 대답했다. 요즘의 일상에서 하나 즐거운 일. 보통은 좋지 않은 일을 상담하러 온다는데, 왜인지 그러면 너무 침통할 것 같다. 죽을 만큼 힘든 하루하루도 아닌데, 대뜸 힘든 이야기부터 꺼내면 엄살 같기도 하고 꾀병인가 싶기도 하고. 일단은 좋은 일을 말해야 그래도 조금은 일상이 평온하다고 스스로도 믿을 것 같다, 고 연오는 생각했다. --- p.9
원래 연오는 말이 느린 편이 아니었다. 상담 선생님과 의사 선생님 앞에서만 느렸다. 꿰뚫어보이는 느낌이 영 좋지 않아서, 또 자신의 솔직한 감정이 뭔지 잘 가늠되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노아 앞에서는 자신이 어떤 감정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지겨웠다. 또 자기 이야기만 빙글빙글 계속 쏟아내겠구나, 생각하고 그 부정적인 에너지를 최대한 덜 흡수하기 위해 느리게 대답하며 대화의 속도를 스스로 조금씩 조절했다. 최대한 생각을 줄이고 노아의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그 불평불만을 받아들일 마음의 공간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었다. 꼭 헤어질 시간을 정해 놓고 만나야 마음이 편했다. ‘나라고 불평불만이 없는 줄 아나? 자기가 가장 힘들다고 생각하는 거야?’라고 생각하다가도, 들려오는 노아의 목소리 사이에서 제정신을 차리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아니야… 이런 이야기를 할 사람이 달리 없어서 그렇겠지. 더 괴로운 나한테 징징대는 걸 자각하지 못하는 것뿐이야. --- p.18
문제는 일할 때였다. 실존하는 사람을 마주하고 있을 때는 쉽게 위장되는 증상들이 모니터만 마주하면 돌아왔다. 사람을 상대하지 않으면 ‘나는 혼자라 너무 힘들다’고 외치는 뇌가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하루 종일 모니터 앞에서 이명과 싸우던 어느 날 ‘죽을 것 같다’는 말만 내뱉으며 진호에게 돌연 휴직계를 내겠다고 했다. ‘죽을 것 같다’는 게 대체 뭐냐는 질문에는 명확히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죽을 것 같은 느낌 그 자체인데, 겪어보지 못한 사람에게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증상에 대한 설명과 함께 “죽을 것 같은, 그런 예상이 돼.”라는 대답만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 p.30
연오는 처음 병원을 찾아간 날을 떠올렸다. 처음으로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날이었다. 출근길에 갑자기 미칠 듯이 불안하고 죽을 것 같다는 공포가 덮쳤을 때, 당장 병원에 가지 않으면 정말 사고가 날 것 같아서 출근도장만 찍고 바로 조퇴한 날이었다. 그 전까지 눈과 관련된 기억은 아름다운 시간들뿐이었다. 새벽에 눈 냄새를 맡고 뛰어나가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을 처음으로 사뿐사뿐 조심스레 밟고 다시 돌아갈 때는 똑같이 그 발모양에 맞춰가며 뒷걸음친 기억, 눈에 산란된 빛에 의해 하늘 가득 분홍색, 보라색이 가득한 광경을 목이 꺾어지게 쳐다본 겨울밤의 기억. 연오는 혼자였지만 눈이 내리면 이상하게 혼자가 아닌 느낌이 들었다. 옆에 같이 있지는 않지만 분명 이 세상에 자신과 비슷하게 설레는 마음으로 눈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을 거란 확신 때문이었다. 하지만 병원을 찾아간 그날, 펑펑 내리는 눈 속에서 혼자 병원을 향해 조금씩 가까워질 때는 자신이 사람들과 같은 감정일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발끝이 차가워서 조금이라도 더 빠른 버스를 타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다가올 한 시간이 자신의 삶을 다르게 정의해버릴 것 같았고, 토할 것 같았고, 도망가고 싶었는데 무엇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은 건지도 알 수 없었다. --- p.132
사람들은 연오가 빨리 이 고통에서 벗어나길 원하면서, 어차피 도피하지 못할 문제면 그냥 빨리 받아들이라고 충고했다.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걸 연오의 대나무숲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내 편이 단 한 명만 있으면 됐는데, 사람들은 외면했다. 끝까지 손잡아 줄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다들 나보다 먼저 지쳐서 나를 떠나갔다. 그런데 그냥 친구들이랑 술 마시고 욕하며 풀라고? 직접 와서 해봐라, 외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우는 가슴에 말뚝박듯 말하는 그들에게 되묻고 싶었다. 가깝다고 생각한 사람들마저 이해하지 못하고 등 돌리는 고통, 그 망연한 고통을 왜 나에게 주었느냐고, 회사에서 내가 그토록 잘못한 일이 무엇이기에 나에게 이런 벌을 주었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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