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는 무엇인가요? 이런 질문을 받으면 나는 늘 대답하기가 망설여진다.
“으음……”이나 “어, 그러니까……”라며 일단은 말을 흐린다. 상대방이 “특별히 없으신가 봐요”라는 반응을 보이면, 사실은 떠들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하기 때문에 “아니, 아니, 아니요”라며 고개를 젓고는 독특한 성적 취향을 고백이라도 하듯 머뭇머뭇 이렇게 말한다.
“취미로 집에서 채소를 키우고 있어요.”
가드닝이라고 말하면 이야기가 빠르겠지만 그런 세련된 단어를 나 같은 아저씨가 입에 올리기는 낯간지럽다. 정원이 있는 집에 살고 있다고 자랑하는 것 같기도 해서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무엇보다 내가 몰두하고 있는 일은, 얼마 전에 봄에 꽃이 피는 스위트피 종자를 심었어요, 호호호, 이런 이야기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채소’다. 오이와 가지와 당근을 키운다.
대답을 망설이는 이유는 멋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취미라면 역시 서핑이지”라며 햇볕에 그을린 얼굴로 하얀 이를 드러내며 자신 있는 미소를 짓거나, “음악을 조금 하는 정도랄까요”라며 겸손해하면서도 “이번에 라이브 하니까 보러 오세요”라는 대답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번에 무밭에 비료를 줄 건데 구경하러 오세요”라고 말해본들 아무도 오지 않을 테니까. ---「감자 애송이의 발아」중에서
정원 텃밭을 일구고 있다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가끔 “어머, 꽤나 다정한 취미를 즐기시네요”라는 분위기의 반응이 돌아올 때가 있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벌레 한 마리 죽이지 못하는 다정한 사람은 채소밭 일구기도 원예도 할 수 없다. “다양한 색의 팬지를 귀여운 발이 달린 화분에 심었어요, 호호”라며 다카시마야 백화점에서 산 밀짚모자를 흔들면서 웃는 부인이라도 화원의 그늘에서는 이렇게 벌레를 끊임없이 압살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미쓰코시 백화점에서 산 샌들이나 다른 무언가를 이용해서. ---「화원의 살육」중에서
꽃이 피는 식물의 원예는 꽃 이름도 도구 디자인도 아저씨를 거절하는 느낌을 풍긴다고 생각하면 피해망상일까. 직접 만드는 케이크를 파는 가게나 작고 세련된 파스타 가게 같은 곳도 종종 있잖아요, 중년 남성을 배제하는 목적으로 붙인 것 같은 이름이.
‘가을빛 펌프킨 파티’나 ‘변덕쟁이 숲속 요정들의 링귀니’라니 말할 수 없어요. 입이 귀까지 찢어진다고 해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거 주세요”만 말하며 주문했을 때 “네? 어떤 메뉴 말씀인가요?”라고 되묻는다면 옆에 적힌 나폴리탄으로 슬쩍 손가락을 옮깁니다. ---「이름 없는 꽃의 이름」중에서
“승객 중에 의사선생님 계십니까?”
비행기 안에서 구급상황이 발생하여 승무원이 긴박한 목소리로 방송을 한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자주 등장하는 상황이지만 나는 현실세계에서는 한 번도 이런 상황에 마주친 적이 없었다.
(…)
그때 나는 생각했다. 이런 장면에서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으면 멋있을 텐데, 하고. 안내방송으로 소설가를 찾을 상황이 과연 있을 것인가, 하고.
“승객 중에 간호사 계십니까?”
이것도 흔히 있을 것이다.
“승객 중에 파일럿 계십니까?”
무서운 상황이지만 가능성은 있을 것 같다.
“승객 중에 경찰 계십니까?”
오리엔트 특급 같다.
“승객 중에 스모 선수분들 계십니까?”
난폭한 행동을 하는 승객을 붙잡는다든가 기체나 차체의 중량 균형을 잡아야 할 상황에 놓인 케이스.
하지만 생각해볼 것도 없이 “승객 중에 소설가 계십니까?” 이런 상황은 없다.
긴급시 도움이 되지 않는 직업 순위가 있다면 소설가는 상당히 상위를 차지할 것이 분명하다. 나는 세상에 무언가 도움이 되는 걸까? 그런 근원적인 자문에 풀이 죽었다.
불러준다면 낭독이든 즉흥 콩트 만들기든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할 텐데. ---「승객 중에……」중에서
안타깝게도 나는 퐁퐁 솟는 샘물처럼 아이디어가 넘쳐나는 두뇌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소설의 소재나 전개나 핵심이 되는 단어 등은 나올 때까지 오로지 기다린다는 것이 기본자세다.
‘나온다’고 말했지만 ‘머리를 써서 열심히 짜낸다’는 느낌이 아니라 어느 순간 갑자기 소나기처럼 ‘내려온다’고 말하는 편이 실제에 가깝다. 언제 내릴지, 양은 얼마나 내릴지 스스로도 알 수 없고, 기상캐스터가 알려주는 것도 아니다.
다만 몇 년이나 이 일을 하는 사이에 경험으로 알게 된 것도 있다. 그것은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아이디어는 전철 밖에 떨어져 있다」중에서
소설가라는 직업에 호감을 느끼지 못했던 나는 지금도 기분은 외부인이다. 소설에 승부 따위 없지만 자신의 분야가 아닌 다른 분야에 정면승부로 도전하고 있는 기분은 변함없다. 일개 독자의 특권이므로 변함없이 다른 소설에도 불평을 하고 있다. 그래도 지금은 ‘이 정도는 나도 쓰겠다’ 같은 생각은 하지 않는다. 어떤 소설도 쓰는 사람 한 명 한 명의 머릿속에서 칠전팔기 끝에 겨우 끌려나오는 것이다. 평가에 우열은 있다고 해도 누군가가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몸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불만을 말하고 있으니까 내 소설이 독자에게 어떤 트집을 잡히더라도 달게 받아들이겠지만, 만약 ‘이 정도라면 나도 쓰겠다’고 말한다면 이렇게 답해주겠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디 한번 해봐.” 쓰면서 토할걸. ---「소설에 참전」중에서
만약 이런 일을 소설에서 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는 은색 컨버터블을 타고 쇼난 해안으로 향했다.”
이런 묘사에 출판사에서 지시가 내려오는 것이다. ‘자동차는 이 잡지에 광고를 내는 회사의 신차로 해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게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다시 쓴다.
“그는 토요타의 프리우스를 타고 쇼난 해안으로 향했다.”
그래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아, 저연비라는 것도 제대로 써주세요. 해안은 거래은행 계열사도 등장하게 해서 구주쿠리하마로 부탁드립니다.’
결국 이렇게 된다.
“그는 저연비 넘버원인 토요타 프리우스를 타고 이와시사키 프린세스 호텔(1박 8,600엔~)이 세워진 구주쿠리하마를 향했다.”
내가 광고 일에서 배운 것은 스폰서가 붙은 표현은 무엇을 소리 높여 강조해도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오는 메시지는 아니라는 것이다. ---「간접광고 방송의 범람」중에서
가지 재배는 손이 많이 갈 일이 없다. 토마토처럼 매일 곁순을 따줘야 하는 성가심도 없고, 내리는 비에 일희일우하는 걱정도 없고, 오이처럼 덩굴을 유도하거나 세심하게 가지 정리를 해야 할 필요도 없다. 심고 나면 거의 방치. 초기 단계에서 자라는 줄기를 서너 개로 정리하여 지지대라고도 말하기도 힘든 비스듬한 부목을 세운다. 작업은 그 정도다. 그런데 그것이 어딘가 부족하게 느껴진다. 성에 차지 않는다. 하지 않아도 되는 쓸데없는 일을 하는 것이 즐거운 가정 텃밭 농사꾼의 뒤틀린 심정을 아무래도 그는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가지는 의외로 괜찮은 놈일지도 몰라」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