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첫 번째 쿠데타
우리는 정권이 탐나서 궐기하려는 게 아니야. 우리의 목표는 나라의 근본을 개혁하고 썩어빠진 병폐를 뜯어고치려고 일어서는 건데 혁명이면 어떻고 쿠데타면 어떤가. 그동안의 정권이 해내지 못한 국가 근대화를 달성하면 평가는 후세의 역사가들이 내려줄 거요.(1권 본문 10쪽)
4·19가 일어나 이승만 정부가 붕괴되고 그 해 8월 23일 내각책임제 하에서 윤보선 대통령-장면 정부가 출범했으나 실망의 연속이었다. 당시 정치인과 국민들은 만악(萬惡)의 근원이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데 의견이 일치하여 개헌을 통해 권력구조를 대통령중심제에서 의원내각제로 바꾸었다.
그런데 진정한 민주주의는 단지 권력구조만 바꾼다고 해서 근본 문제, 즉 국민들이 배불리 밥을 먹고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는 시스템이 저절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진리를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초등학생들마저 데모에 나서고, 심지어 데모를 진압해야 할 경찰관들마저 집단 시위에 나설 정도로 이 나라는 ‘시위 공화국’으로 돌변했다.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정치집단이 부재한 상황에서 단연 돋보이는 파워 폴리틱스 집단은 군부였다. 60만 대군이라는 양적 팽창도 그렇거니와 미국식 선진교육을 받고, 대규모 인력들이 미국 유학을 통해 체득한 근대화된 과학적 지식과 행정능력, 훈련된 리더십은 국내의 다른 어느 집단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가장 선진화된 파워 엘리트 그룹이었다. (1권 본문 129쪽) --- 「현실정치에 눈을 뜨다」 중에서
박정희 정권과 대립각을 세웠던 함석헌은 잡지 『사상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을 게재했다.
‘또다시 혁명해야지. 혁명밖에 다른 길 없다. 뱃속에 병이 들었으면… 하다가 죽는대도 배를 가르고 수술해야지 그 길밖에 길이 없다.’(1권 본문140쪽)
우리는 정권이 탐나서 궐기하려는 게 아니야. 우리의 목표는 나라의 근본을 개혁하고 썩어빠진 병폐를 뜯어고치려고 일어서는 건데 혁명이면 어떻고 쿠데타면 어떤가. 그동안의 정권이 해내지 못한 국가발전을 달성하면 평가는 후세의 역사가들이 내려줄 거야.(1권 본문 145쪽)
스칼라피노 교수는 ‘콜론 보고서’를 통해 한국에서 군사쿠데타 가능성을 예고했으나 “당분간 그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기술함으로써 한국의 청년 장교단을 격렬하게 자극했다. 어쩌면 스칼라피노의 이 모멸적 표현이 한국의 소장파 장교들을 쿠데타로 나서게 하는 촉진제 역할을 했는지도 모른다.(1권 본문 154쪽) --- 「세 차례에 걸친 쿠데타 모의」 중에서
2. 두 번째 쿠데타
박정희 정권 출범 후 한일 국교 정상화는 세 가지 현실적 이유에서 제기됐다. 첫째, 한국의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금 확보와 안보 차원. 둘째, 미국의 글로벌 냉전전략 추진 차원. 셋째, 일본의 경제적 필요 차원에서 극히 긴요한 현실적 과제로 대두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1권 본문 321쪽)
대중 정치인으로서 국민의 지지도나 인기에 연연했다면 박정희는 한일협상을 포기하거나 연기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박정희는 불법 시위가 도를 넘었다고 판단하고 정치인으로서의 대중적 인기 대신 혁명가적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는 제2의 5·16을 감행하는 심정으로 6월 3일 오후 10시, 서울시 일원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1권 본문 346쪽)
박정희를 비롯한 당시 국가 지도부는 청구권자금을 모든 국민에게 균등하게 혜택이 돌아가고, 다음 세대 후손들에게까지 기념할 만한 사업을 넘겨줄 수 있도록 ‘의미 있는 투자’에 사용되어야 한다는 엄격한 기준과 원칙을 수립했다. 그 결과 1966년부터 1975년까지의 10년간 청구권자금의 집행실적을 종합 정리하여 기록을 남긴 것이 『청구권자금 백서』(1976년 12월)다. 이 백서에 의하면 포항제철 건설에 무상 3억 달러 중 3080만 달러(무상 자금의 10.8퍼센트), 유상 2억 달러 중 8868만 달러(유상 자금의 44.3퍼센트) 등 총 1억 1948만 달러를 투자했다. 포항제철 건설이야말로 1970년대 한국의 공업화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기적의 역사다. 특히 1970년대 중화학공업 건설 과정에서 공작기계공업, 산업기계공업은 물론 자동차·선박, 전자공업에서 요구되는 소재와 중간재의 자체 공급이 가능해짐으로써 한국의 공업화 수준을 크게 업그레이드하는 결정적 요인이었다.
한국 산업화의 대동맥 역할을 했던 경부고속도로 건설사업도 일본의 청구권자금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또 전 국토 종합개발사업의 상징이랄 수 있는 소양강댐 건설도 총 소요자금 2161만 3,000달러 전액을 청구권자금으로 충당했다. 공사기간만 무려 6년 반(1967년 4월?1973년 10월)이 걸린 아시아 최대, 세계 4위 규모의 대규모 토목공사로 인해 한강 유역 일대의 홍수 조절이 가능해졌고 한수해(旱水害) 예방, 그리고 생활용수와 농공업용수 문제를 일거에 해결했다. (중략) 박정희는 전 국민의 피와 땀이 서려 있는 자금을 전 세계의 전문가나 국내의 야당, 학생들이 그토록 반대했던 포항제철과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거의 70퍼센트 가깝게 투입했다. 인기를 먹고 사는 정치인이었다면 이런 식으로 국가의 백년대계를 앞세워 수많은 국민의 반대를 무릅쓰고 호기롭게 투자할 수 있었을까? (1권 본문 357쪽) --- 「한일 국교 정상화」 중에서
한국군의 월남전 참전은 안보 차원의 접근법이었지만 그로 인한 경제적 이익도 막대했다. 한국 기업들이 월남에 납품할 기회가 주어졌고, 한국 용역회사들이 한국군과 미군 지원활동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으며, 한국의 건설 회사들도 각종 건설공사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힘입어 당시 한국 철강수출의 94퍼센트, 수송 장비 수출의 52퍼센트가 월남이었다. (1권 본문 405쪽)
한국의 월남전 참전으로 한미관계가 긴밀해지면서 미국은 한국의 경제발전을 지원하기 위해 차관을 대폭 늘렸고, 한국 제품에 대해 시장을 개방했다. 1964년 한국의 총 수출에서 대미 수출의 비중이 30퍼센트를 돌파했고, 1968년에는 무려 52퍼센트에 달했다. (1권 본문 407쪽)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