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가구는 대부분 장인들에 의해 만들어져서 공예 개념이 강한 반면, 현대 가구의 역사는 산업계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가구 산업은 노동 집약적 산업으로 일자리 창출이 가능하고, 기술의 파급 효과가 크며,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알려져 있다. 디자인의 역사가 산업계와 밀접하게 연관되는 만큼, 가구의 역사 또한 산업체의 발전과 무관하지 않다. … 한국가구사의 정립은 국내 가구 산업이 세계로 뻗어 나갈 수 있는 근간이 될 것이며, 정부의 가구 산업 정책을 수립하는 기초 자료가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나라 가구의 우수성을 국내외로 알리고, 소비자의 인식 전환을 이끌어냄은 물론 세계적으로 한국문화의 경쟁력을 갖추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 머리말
《삼국사기》 권 제39 잡지에는 신라시대에 옻칠 공예를 전담한 부서인 칠전(漆典)에 대한 기록이 있어 당시 생활에서 옻칠을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또 옻칠의 한 기법으로 기물이나 가구 등에 옻칠로써 그림을 그려넣는 칠화와 밀타회로 만들어진 칠기가 출토되어 백제와 마찬가지로 옻칠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밀타회는 밀타승(密陀僧) 안료를 이용한 칠의 한 종류로, 1809년에 빙허각 이씨(憑虛閣 李氏)가 쓴 《규합총서閨閤叢書》에는 “먼저 칠기나 질그릇 위에 채화(彩畵)를 한 다음, 들기름에 무명석(無名石)과 백반을 조금 넣어 불로 달이고 위에 골고루 칠한다”라는 설명이 있다. ---제2장. 삼국시대
삼국시대의 주거 생활은 좌식과 입식이 공존하였는데, 온돌문화의 유입에 따라 입식에서 좌식으로 변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온돌은 권력을 가진 상류층에서만 사용되었던 만큼 가구 역시 일반적으로 쓰이지 않았다고 짐작된다. 출토된 목제품에는 바가지, 주걱과 같은 주방용기와 농경생활에 필요한 농기구가 주류를 이루며, 그 외에 놀이기구와 악기가 있다. 벽화나 문헌에 나타난 가구로는 걸상, 평상과 같이 앉을 수 있는 의자류와 책상, 탁자, 소반과 같이 식사를 하거나 책을 볼 때 사용하는 탁자류가 있으며, 이외에도 신라시대의 궤가 출토되어 상자류의 가구도 사용했다고 추측한다. --- 제2장. 삼국시대
고려시대에 꽃 피운 나전칠기와 유사한 통일신라의 유물은 없으나, 금속공예품에 사용된 평탈 기법에 나전이 사용된 사례가 남아 있다. 또 이 시기의 가구 유물이 전해지지 않지만, 삼국시대의 전통을 이어받았다는 측면에서 이전에 사용했던 소반, 평상 등이 계속 사용되었으리라 추측된다. 통일신라의 유물은 대접을 비롯한 식기, 거울과 빗 등의 생활용품이 발굴되었는데, 대부분 옻칠로 마감되어 이제까지 보존되었던 것으로 추측한다. 목재는 삼국시대에도 사용되었던 참나무와 소나무를 중심으로 다양한 수종이 나타난다. --- 제3장. 남북국시대
고려시대 나전칠기의 우수성은 고려 중엽부터 칠기, 나전칠기, 황모필, 묵 등의 공예품 수출이 증가했다는 기록으로 뒷받침된다. … 나전칠기의 중요한 재료는 나전과 칠이다. 특히 경상남도는 따뜻한 기후로 인해 목재와 대나무 그리고 영롱한 빛의 전복패가 풍부했으며, 옻칠이 잘되던 충무 지역에서 목공예가 발달하여 통영장과 통영소반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또 통영에는 과거 병참기지 역할을 하는 6방 13공방을 두고 갖가지 군수물자를 만들게 했는데, 공예품을 만드는 공방도 함께 있어 통영의 목공예가 발달하는 원인이 되었다. --- 제4장. 고려시대
고려시대에는 소목장이라는 직업이 있어서 가구와 목공예품을 제작하였으며, 관련 부서로는 도교서(都校署), 공조서(供造署)가 있었다. 도교서는 궁중에서 사용하는 도구의 세공 및 조각 등 제작 전반을 맡아보던 관청으로 공양왕 제34대 3년에 토목과 건축물을 관장하는 선공사(繕工司)로 합쳐졌다. 또 공조서는 궁중의 장식에 관련된 도구를 총괄하던 관아로 조선시대까지 계속되었다. 이 시대에는 활 쏘는 기예를 중요하게 여겨 활을 만드는 기술도 발달했는데, 여기에 주로 사용된 목재는 느티나무, 버드나무, 뽕나무이다. 공민왕이 그린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에도 화살 통을 메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보이는 것처럼 당시에는 화살을 만드는 장인으로 통장과 화살 통을 만드는 궁통장이 있었다. 이렇듯 활과 관련된 용품을 만드는 데 사용된 목재 및 기술이 가구 제작에도 관련되었을 것으로 예측된다. --- 제4장. 고려시대
조선시대에는 양반가에서 주로 가구를 사용하였으며, 유교문화로 인해 남성과 여성의 생활공간이 뚜렷하게 구분되어 … 가구도 사랑방가구, 안방가구, 부엌가구로 구분하며 공간에 따라 가구도 서로 다른 양상을 보인다. 즉 사랑방 가구는 선비의 곧고 청렴한 분위기를 나타내듯이 간결하고 수수한 반면에 안방가구는 장식적이며 색상이 화려하다. 가구에 나타난 문양을 살펴보면 조선 초기 나전에는 연당초문(蓮唐草文), 보상화문(寶相華文), 쌍봉문(雙鳳文), 쌍룡문(雙龍文) 등이 사용되었으며, 동물 문양에는 불사조, 용, 봉황 등이 쓰였다. 불교 문양으로는 여의두문(如意頭文), 안상문(眼象文), 뇌문(雷文), 태극문(太極文)이 쓰였다. 후기에는 장수를 기원하는 십장생(十長生: 산·물·나무·돌·구름·풀·사슴·거북·소나무·해) 문양과 오복을 상징하는 박쥐, 부귀를 나타내는 모란, 회화에도 나타나는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 등이 쓰였다. --- 제5장. 조선시대
“기산풍속도(箕山風俗圖)”는 19세기 말에 활동했던 기산(箕山) 김준근이 그린 풍속도를 두루 이르는 말이다. … 기생과 한 남자가 쌍륙을 치는 광경으로 왼쪽에는 술상이 놓여 있다. 술병과 국수 그리고 중국풍의 수저가 있으며, 한 남자 아이가 손에 신선로(神仙爐)를 들고 상으로 걸어오고 있다. 상판의 가장자리는 넓은 원목으로 만든 상판이 휘지 않도록 사면에 변죽을 둘렀으며, 다리 부분과 상판을 이어주는 중간 부분에 홈이 파인 듯 안쪽으로 들어가 입체감이 살아난다. 구름 모양으로 말려들어간 발과 곡선의 운각에서 알 수 있듯이 김준근의 다른 그림에 담긴 상의 형태보다 장식이 많으며 고급스럽다. 쌍륙의 말판은 단순한 사각 형태로 목재로 만들어졌다. --- 제5장. 조선시대
짜맞춤은 목가구를 제작할 때 목재와 목재를 조립하는 방법으로 짜임이라고도 한다. 금속 나사나 못을 사용하지 않던 전통 목가구 제작에서는 짜맞춤과 이음 기법이 가구의 기능과 모양을 좌우할 만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 조선시대의 가구에 사용된 짜맞춤의 종류는 맞짜임, 장부짜임, 턱짜임, 연귀짜임, 사개물림 등으로 다양하며, 가구의 구조에 따라 다르게 적용된다. 짜맞춤의 명칭은 목재와 목재가 조립되는 모습에서 따온 것이 많다. … 맞짜임은 조립되는 두 개의 면을 맞대어 접합하는 것으로, 가구의 일부분이나 모서리에 사용한다. 표면상의 모습은 같으나 보이지 않는 부분의 구조에 따라 맞짜임의 종류가 다양해진다. 여기에는 숨은장부촉 맞짜임, 막장부촉 맞짜임, 막장부촉 맞짜임 등이 있다. --- 제5장. 조선시대
서구 문물의 영향을 처음으로 받은 곳은 왕실로, 궁궐 건축에서 실내 장식 그리고 가구까지 서구화되었다. 이 시기에는 17세기부터 18세기에 이르는 프랑스와 영국의 르네상스 양식을 비롯해 중국 가구까지 수입되었다. 또 입식 가구가 국내에서 제작되어 서구식과 전통 가구가 공존하였으며, 광복 이후에는 서구식과 전통이 절충된 양식이 등장하였다. 서양의 대표적인 가구는 바로크나 로코코 양식의 입식 의자와 테이블이 있으며, 일본에서 유입된 것으로는 단스(簞?)로 여러 개의 작은 서랍이 달린 서랍장이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에 들어와 차단스라는 수납장으로 유행했는데, 대부분 마루에 위치하며 그릇이나 옷가지 등을 수납하는 데 썼다. 여러 개의 서랍과 목재나 유리로 된 여닫이나 미닫이문을 달았으며, 중국의 차탁자와 같이 뚫린 구멍이 많은 차단자도 유입되었다. --- 제6장. 일제강점기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