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몇 식경 전까지만 해도 저 김준이는 노예였사옵니다. 합하께서는 우리 고려국을 저와 같은 노예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 싸우려는 것이 분명합니다. 몽고는 돌아갔으나 조만간 다시 우리 땅으로 쳐내려올 것이옵니다. 싸우지 않으면 백기를 들어야 하옵니다. 백기를 들게 되면 황제 폐하도 아니 계시고, 도방의 합하도 아니 계시고, 대감께서도 아니 계십니다. 모두가 노예가 되옵니다. 바로 얼마 전까지 제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옵니다.”---3장 절망 뒤에 오는 것, p.129
“기나긴 전쟁을 치르면서 백성들은 암담한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그리고 희망입니다. 우리 고려가 지옥의 야차와도 같은 저 몽고와 싸워 이길 수 있다는 믿음, 그리하여 종국엔 고려의 자주성을 지켜내고야 말겠다는 희망. 그러한 마음이 있어야만 역경을 이겨낼 수 있고, 무너진 고려의 얼을 다시금 바로세울 수 있습니다. 대장경은 분명히 백성들의 마음을 지탱해주는 불빛이 되어줄 것입니다.”---3장 절망 뒤에 오는 것, p.136
“한 가지만 생각하게. 전쟁에 지치고 궁핍한 삶에 지친 백성들이 그나마 위안을 받고 있는 것이 대장경일세. 백성들에게 있어 대장경은 빛일세. 불빛이 없으면 어찌 어둠 속에서 배를 저어갈 수 있겠는가? 우리의 할 일은 그 불빛을 일구어주는 것일세. 우리 같은 부처님 제자들이 백성들을 구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야. 불제자인 자네의 소임이기도 해. 그 소임은 회피하면서 언제까지 조정만 탓하고 있을 생각인가?”
“사형…….”
“그만하면 됐네. 자네의 발길이 이곳 남해에 닿은 것이 바로 부처님의 뜻일세. 부처님께서 자네를 이곳으로 불러들이신 게야. 허니 만행은 이것으로 끝내고 나와 같이 강화로 가세. 자네가 할 일이 많아.”
“땡초가 다 되어버린 저 같은 놈이 무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할 일이야 많아. 아니, 없더라도 찾아야하질 않겠는가. 본래 도를 깨우치는 목적은 자신을 구하고 다시 세상을 구하는데 그 뜻이 있는 것. 팔만대장경판의 완성기간을 자네 불자의 삶에 있어 최대의 수도 기간으로 삼아 정진을 해봐. 사나이 일대사, 목숨 한 번 걸어볼 만한 큰 일이 아닌가. 일어서게. 자네가 번뇌를 씻고 부처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내가 돕겠네.” 4장 다시 새기는 혼, 팔만대장경, p.147
전날 저녁이었다. 서산에 해가 걸릴 즈음에 김준이 최우의 침소 밖 마당에 거적을 깔고 앉아 죽음을 청했다. 그렇게 시작된 석고대죄가 날이 밝고 노을이 번질 무렵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합하를 기망한 사실이 김준이로서도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옵니다. 깨끗이 자결하여 합하께 지은 죄를 씻을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최우는 머리를 조용히 흔들었다.
“계집 죽는 것이야 상관이 없지만 이 험난한 전란에 쓸 만한 무신 놈 하나를 잃는 것은 아까운 일이야.”
무신. 최우는 김준을 무신이라 했다. 군영에 몸을 담고 있다고 하여 모두가 무신이라는 존칭으로 불리는 것은 아니었다. 그만한 자질을 지녔고, 그만한 업적을 세웠으며, 그에 상응하는 존경을 한 몸에 받고, 후대에까지 그 이름이 전해질 만큼 용맹하고 대단한 무인. 날고뛰는 무인들이 산재한 막부에서 무신으로 대접을 받는다는 것은 사나이 일대사에 기록될 만큼 흥분되고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최우는 그를 배반하고 그의 후실을 취한 죄인 김준을 무신으로 인정해주고 있었다. 박송비는 제 자신이 무신이라는 말을 들은 것처럼 가슴이 벅차올랐다.---5장 위험한 선택, p.225
“김준아, 한번 떠오른 해는 반드시 다시 진다. 그렇지 않느냐?”
“그렇사옵니다. 대제국 몽고도 언젠가는 지게 되어있사옵니다.”
“너는 아직도 우리 고려가 몽고에 대적할 수 있다고 믿느냐?”
“대제국 몽고를 상대로 이기겠다는 생각은 소신도 버렸사옵니다. 다만, 몽고는 여기서 아주 멉니다. 끝까지 저항하다 보면 저들도 아니 지칠 수가 없사옵니다. 그들이 제 풀에 꺾여 고려에게서 눈을 돌릴 때까지 싸우는 것이 옳다고 생각할 따름이옵니다.”
“그래. 고려의 사직을 굳건히 보존하고, 고려가 주체국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싸우는 길 밖에 없을 것이다. 돌아가신 아버님께서도 고려의 혼을 반드시 지키기 위해서라도 싸워야 한다고 누누이 당부하셨지. 아버님의 생각이 곧 나의 생각이다.”---5장 위험한 선택, pp.238~239
술렁이는 신료들 가운데서 분기에 찬 목소리로 청하는 이가 있었다. 편전 마루에 부복한 김준이 큰 소리로 말을 이었다.
“폐하! 이 나라 고려는 그 옛날 중원을 평정한 바 있는 고구려의 후손들이옵니다. 비록 오랜 전쟁으로 국력이 기울고, 또 다른 병란의 위험을 막기 위해 몽고와 사대조공의 관계를 맺기는 하였으나, 폐하께오서 친히 입조를 하심은 우리 고려를 창건하신 국조를 욕되게 하는 것이며, 또한 고려의 근본을 부정하는 것이옵니다. 폐하, 이 고려의 땅에 언제까지 저들 달단의 무리를 용납하시려는 것이옵니까? 작금은 비록 저들에게 굴복하여 머리를 숙이고 있사오나 이 땅에서 몽고족을 몰아내고 온전한 고려의 주권을 되찾는 일에 폐하께서 나서주심이 이 땅의 만백성이 한 뜻으로 바라는 일이옵니다. 하온데 어이하여 백성들의 희망을 저버리려 하시옵니까?” ---9장 이루지 못한 꿈, pp.295~296
……결코 저들에게 이 고려를 내주어서는 아니 된다고 하질 않았느냐! 항복한다면 지금 당장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지 몰라도 혼을 잃은 고려는 결국 멸망하게 될 것이라고 내 누누이 강조하지 않았느냐. 이놈, 김준이! 썩 일어나 싸워라! 네놈의 손으로 내어준 막부를 되찾고 고려를 위해 네놈의 목숨을 버리란 말이다, 이놈!
최우의 쩌렁쩌렁한 호통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게 울려 김준은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9장 이루지 못한 꿈, p.2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