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새벽 미사를 준비하면서 “시간만 첫 새벽이 아니고 마음도 첫 마음이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는 한 사제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열정이 담겨 있는 책. “마지막까지 정직하려는 몸부림을 사랑이라고 불러도 좋은 것 아닐까?”라고 고백하는 한 신학자의 깊고 예리한 통찰이 갈피마다 살아 숨 쉬는 책이 여기 있습니다.
저자가 안내하는 생각의 길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긍정적이고 따뜻한 눈길, 성실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세상과 인간을 좀 더 새롭고 폭넓게 이해하게 됩니다.
읽는 내내 우리 자신이 서 있는 삶의 자리를 진지하게 돌아보며 성찰하게 해 줍니다. 선과 진리에 대한 갈망과 신앙에 대한 확신으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행복하고도 고마운 체험을 하게 됩니다. --- ‘추천의 글’에서
우정 같은 소중한 인간관계까지 모조리 삼켜 버리는 돈의 이데올로기, 희생 같은 인생의 보람까지 깡그리 무력화시켜 버리는 편리의 이데올로기, 사랑 같은 숭고한 종교심까지 송두리째 상품화시켜 버리는 이데올로기, 책임 같은 성숙한 인간 자긍심까지 온통 고갈시켜 버리는 이용 이데올로기 등등 앞에서 동물도 자연도, 그래서 결국 인간도 다들 시름시름 앓고 있는데, 저 자신도 그 안에 깊이 연루되어 휘둘리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으니, 다시 거센 바람을 만난 호수 위의 난선(교회) 안에서 가냘픈 난간에 의지하며,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주님을 향해 간곡히 외칠 뿐입니다. “주님, 당신이시오면……!”
25년의 길목에 서서 보니 지나간 부끄러운 시간들과 앞으로 맞이할 두려운 시간들이 저 자신을 자꾸 왜소하게 만듭니다. 자신이 왜소하게 느껴질수록 존재를 주신 하느님과 주변에서 제 존재를 윤기 있게 해 주신 한 분 한 분 고마운 분들이 마냥 커 보입니다. 그분들께 다시 의지하며 용기를 내어 다음 발걸음을 옮깁니다. 천상에서, 지상에서 사랑으로 결합된 모든 고마운 분들께 감히 이 작은 책자를 바칩니다. - ‘사랑으로 결합된 모든 고마운 분들께’에서
진지하게 앎을 구한다는 것은 이미 자신의 지식이 보잘것없다는 고백을 담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성싶습니다. 그리고 이 고백이 모여 우리의 아름다움과 좋음과 꿈을 만듭니다. 다시 한 번 감동과 기대를 담아 이렇게 마음으로 외칩니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같이 모여 그 아름다움을 나누는 모습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좋은 사람들이 같이 모여 그 좋음을 나누는 모습은 정말 좋습니다. 꿈 많은 사람들이 같이 모여 그 꿈을 나누는 모습은 정말 꿈같습니다.” --- ‘좋은 사람들’에서
그래, 그래서 신학을 한다는 것은 뜻 모를 사랑에 몸 맡기는 것 아닐까? 마지막까지 정직하려는 몸부림을 사랑이라고 불러도 좋은 것 아닐까? 논리는, 법은 허위 속에서 허위를 돕지만, 사랑은 끝내 그 허위에서 벗어나게 한다고 믿는 것 아닐까? 그것은 때로 부조리한 아픔 속에서 무력하게 우는 울음 아닐까? 그것은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숨어 흘리는 피땀 아닐까? --- ‘신학을 한다는 것-하나’에서
‘첫 번째 사람’이 걸어간 길이 뒤따라오는 사람의 길을 미리 보여 준다는 삶의 경험을 대입하면, 진지하게 믿는 일, 끝까지 사랑하는 일은 ‘곰곰이 생각하는 일’을 비껴가거나 생략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참된 그리스도교 신앙인이려면 반드시 ‘그리스도교 철학자’이기도 해야 하는 이유이다.
아름다운 5월, 화가가 되어 마음의 붓을 든다. 그리고 신앙 진리 앞에서 ‘곰곰이 사유하시는’ 성모님의 모습을 맑은 하늘 위에 그려 본다. 성모님께서 입고 계실 옷 빛깔은 무엇일지, 순수한 사유의 색깔은 어떤 것일지 고민도 해 본다. 그래서 더 아름다운 계절이다. --- ‘철학자 성모님’에서
주님, 눈을 뜨고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보니 눈을 뜨는 것이야말로 당신의 말씀이 이루시는 소중하고 놀라운 기적입니다. 보는 것이 당연하고, 못 보는 것은 비정상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보니 보는 것이야말로 주님께서 저희에게 주신 ‘전혀 당연하지 않은’ 아주 귀한 선물입니다. “제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하는 기도가 주님께 청하는 소망의 전부였던 바르티매오 앞에서, 당신께 드린 우리의 자질구레한 기도들은 얼마나 염치 없는 사치였는지요. “주님, 보입니다!” 하면서 그저 고마워하기만 해야 할 그 순간에도 저의 마음은 철없이 ‘눈’을 감은 채, 가끔 삶이 힘들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산다는 것은 성가신 일’이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주님, 보입니다!’에서
그의 호의에 아무것도 보답하지 못해 미안해하며 그런 마음을 표현했을 때 화내며 하던 그의 말이 생각난다. 친구는 자기 친구가 좋아하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자기가 해 준 것의 백 배 천 배의 보상을 받는다고. 나는 자기에게 친구라고. 내가 자기에게 고마워하는 것보다, 자기는 정말 나에게 무진장 더 고마워하고 있을 거라고. 그에게 나는 분명 수단이었던 적이 없었다. 그가 목적으로 대한 것을 수단으로 전락시킬 뻔한 것은 오히려 나였다. 예수님 발 앞의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되어 ‘그 사람 생각만 하면, 저절로 웃음이 난다.’는 어디선가 들은 말을 떠올린다. 우정과 신앙은 기막히게 서로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 ‘나를 키워 준 만남’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