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몸이 얼어붙었다. 이제는 너무도 분명해졌다. 아빠는 내가 죽은 줄 알고 있었다. 나는 지하 저장실을 뛰쳐나가 아빠의 품에 안기고 싶었다. 그런데 왜 그러지 못하는 걸까? 최소한 소리리도 질러야 하는 건 아닐까?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이제 아빠가 올 거라는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이었다. 오래전에 이미 포기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단지 내 자신이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이다. 아빠와의 약속에 대한 한순간의 의심조차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나를 지금까지 살아 있게 한 것은 바로 믿음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믿음이 현실로 이루어졌다. 믿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아빠가 내 곁에 아주 가까이 앉아 있었다. 바로소 나는 의심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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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건 카드나 마찬가지야, 운이 좋건 나쁘건 간에 사람은 정해진 운명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단다."
나는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정말로 예정되어 있는지 몹시 궁금했다. 때로는 정말 그런 게 아닐까 의심스럽기도 했다. 만약 나의 운명이 정해져 있다면 ,굳이 내가 무언가를 하려고 애쓸 필요가 있을까?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는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내요을 알 수 없도록 뒤집어져 있는 카드와 매우 흡사한 게 아닐까? 과연 누가 앞일을 알 수 있을까?
운명은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만약에 스노우가 찬장에 구멍을 뚫고 그 안으로 기어들어간다면, 녀석은 살 운명인 것이다. 어쩌면 굳이 녀석이 찬장에 구멍을 뚫을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내가 녀석을 구하러 갈 운명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도 카드에 나와 있다면, 그 카드에는 내 이름이 적혀 있을 것이다. 알렉스라고...
엄마가 떠난 날부터 나는 엄마가 내 운명의 여신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엄마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다. 이따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엄마의 그림자가 획 지나간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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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아무래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분명한 것은 어쟀거나 나는 존재했을 것이란 사실이다. 다른 부모 밑에서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해도, 나는 여전히 나일 뿐이다. 지금이 아니고, 다른 시대에 태어났다 할지라도. 그러니까 전쟁이 끝난 후에 말이다. 이 지겨운 때를 피해 태어났으면 좋았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