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다 됐습니다. 이제 패딩 벗으시고 카운터 앞쪽으로 잠시 서주시죠.”
우진은 마치 스태프처럼 매튜의 말을 빠르게 통역했다. 그러자 미자가 부끄러운지 가게 안을 한 번 둘러보고는 마지못해 패딩을 벗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가게 안에 조용히 소곤대던 사람들이 큰 소리로 감탄사를 터뜨렸다.
“이야!”
“어머, 어머. 미자 봐! 어머!”
심지어는 박수까지 치는 사람도 있었다. 우진은 사람들의 탄성이 마치 축복해 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런 반응이라면 머지않아 가게를 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미자는 하이힐을 신어본 적이 없는지 상당히 엉성한 걸음으로 테이블 앞으로 이동했고, 그 때문에 잠시 웃음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미자는 카운터 앞에 도착하더니 어정쩡한 자세로 서서 이쪽을 바라봤다.
매튜는 우진의 카메라를 건네받더니 우진에게 입을 열었다.
“선생님, 말씀하시죠.”
“네?”
“작품에서 표현하려고 했던 의미라든가. 모델이 좀 더 작품을 녹여낼 수 있도록 필요한 요구를 하시면 됩니다.”
단지 왼쪽 눈으로 보였기에 만든 것인데 의미가 있을 리가 없었다.
옆에 있는 매튜는 계속 작품이라고 하며 치켜세우고 있었고, 뒤에 있던 사람들은 어떻게 촬영을 할까 궁금해하고 있었기에 부담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자신을 보고 있는 미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럼 그냥 자연스럽게 움직여 보시겠어요……?”
“이렇게요……?”
전문 포토그래퍼가 있었다면 알아서 했을 테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해야 했고, 디자이너와 모델이 둘 다 초보이다 보니 생기는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포즈에 진척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 모습을 보던 매튜가 턱을 괴며 입을 열었다.
“선생님, 좀 어색한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모델 경험이 없어서 그런 것 같은데. 영상에서 뽑아 쓸 거라서, 아주 잠깐만이라도 자연스럽게 보이면 됩니다.”
“네…….”
이미 알고 있는 얘기를 심각한 얼굴로 얘기하는 매튜였다. 아무래도 포즈를 취하는 건 무리일 듯싶었다. 어차피 영상에서 사진을 뽑아 쓸 생각이었기에 차라리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모습을 찍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저, 그냥 좀 자연스럽게 움직여 보실래요? 평소처럼요.”
“이 옷 입고 평소처럼요……? 가게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커피를 만드는 것밖에 없는데.”
“아! 그게 좋겠네요. 커피 만들어보세요.”
미자는 불편한 듯 원피스를 한 번 쓰다듬더니 쩔뚝거리며 카운터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매튜도 카메라를 들고 좁은 카운터로 따라 들어갔다.
“뭐 드실래요?”
“네?”
“평소처럼 하라면서요.”
“아! 전 아메리카노 주세요.”
“3,000원입니다.”
“네?”
너무 평소 같은 모습에 우진은 마지못해 계산까지 했다. 그래도 아까보단 훨씬 자연스러웠다. 그때, 매튜가 곤란한 듯 화면을 보더니 고개를 들어 천장에 달린 조명을 쳐다봤다.
그러자 옆에 있던 미숙이 재빠르게 카운터의 불을 전부 켰다. 그제야 화면이 잘 잡히는지 매튜는 미숙을 보며 엄지까지 내밀었다.
그 이후로는 일사천리였다. 어차피 영상을 찍는 것이기에 포즈를 취할 필요도 없었고, 그저 커피 만드는 모습을 찍고 청소하는 모습을 찍을 뿐이었다.
하지만 한 거에 비해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어느새 2시간이란 시간이 지났고, 별것 없는 현장 모습에 가게에 있던 손님들도 하나둘씩 돌아갔다.
“선생님, 이만할까요? 이제 영상편집만 하면 될 것 같습니다.”
“괜찮을까요?”
“네, 작품이 워낙 좋아서 문제없습니다.”
계속 작품이라고 하는 통에 부끄러웠지만, 싫지는 않았다.
우진의 얼굴엔 가벼운 미소가 생겼고, 그런 얼굴로 미자에게 수고했다고 말을 했다.
“이렇게 커피만 만들다 끝나도 되는 거예요?”
“충분히 많이 찍었어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아주머니, 가게에서 촬영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괜찮아요. 덕분에 매상도 오르고. 호호, 그럼 우리 미자 사진은 언제 나오는 거예요?”
주인아주머니의 질문에 미자도 솔깃한지 우진을 봤지만, 매튜가 작업을 하기에 우진도 알 수는 없었다.
“작업을 해봐야 알 것 같아요.”
“그럼 혹시… 사진 나오면 제 개인 SNS에 올려도 돼요?”
“네, 물론이죠.”
***
미국 뉴욕. 오후 업무를 보던 제이슨은 회사로 걸려온 전화에 약간 걱정되었다.
한국으로 간 매튜였다. 한국은 아마 새벽일 텐데 이 시간에 전화한 걸 보면 좋은 소식은 아닐 것 같았다.
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아무래도 못 하겠다는 말을 하려는 것 같았다. 눈치 없는 매튜라면 곧바로 제프에게도 말할 것이었다.
다독여야겠다고 생각하며 전화를 연결했다.
“네, 매튜 씨, 한국은 지금 새벽 아닙니까?”
-네. 지금 숙소 들어와서요.
“지금요? 무슨 일 있으신가요?”
-아니요. 촬영 때문에 지금 들어온 건데요.
분명 한국은 새벽일 텐데 무슨 촬영을 했다는 건지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때 매튜의 말이 이어졌다.
-그거보다 저한테 주신 선생님 정보 때문에요. 자료에 누락된 게 너무 많은데, 전부 주신 거 맞습니까?
“네? 무슨 선생님을… 혹시 임우진이라는 사람 말하는 겁니까?”
-네, 선생님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는데.
제이슨은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어 귀까지 후볐다. 회사 내에서도 매튜에게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듣는 디자이너는 제프를 포함해 세 명뿐이었다.
항상 디자이너라고 부르거나 이름을 부르는 매튜가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모습에 적잖이 놀랐다.
-회사가 선생님에 대해 모를 리도 없을 텐데 저한테 왜 숨기는 거죠? 제가 알면 안 되는 거라도 있는 건가요?”
제이슨은 어이가 없었다. 워낙 눈치가 없는 매튜였기에 곧 망할 거라는 말까지 해가며 붙여놨는데 이상한 오해를 하고 있었다.
그것보다 도대체 뭘 보고 매튜가 저러는지 궁금했다. 제프에 이어 매튜까지 저러니, 임우진이란 사람에게 분명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돈 냄새가 났다. 그렇다면 제프의 부탁으로 매튜를 보낸 것이 최고의 선택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매튜가 꺼낸 촬영이라는 말을 보면, 우진의 작품을 촬영했을 것 같았다.
“매튜 씨, 오늘 미스터 임 촬영 현장에 다녀오신 겁니까?”
-네, 제가 거기 말고 갈 데가 없죠.
“그럼 오늘 촬영한 제품이 괜찮았습니까? 촬영본은 무리겠죠?”
-네? 무슨 소리… 아…….
제이슨은 매튜의 ‘아’ 소리에, 분명 그가 뭔가 오해를 했음을 직감했다. 아니나 다를까 매튜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이제 보니 절 스파이로 보내신 거군요?
“하… 아닙니다. 못 들은 얘기로 하시죠.”
-실망했습니다. 의류업계의 대들보나 다름없는 우리 제프 우드의 대표 자리에 있는 분이 그런 생각을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큼, 그런 거 아닙니다.”
역시 매튜와 말을 오래 섞어선 안 됐다. 제이슨은 오해를 풀려고 했지만, 매튜는 기분 나쁜 목소리로 다음에 전화를 한다며 끊어버렸다.
“다들 대표를 개똥으로 아네. 하…….”
제이슨은 끊어진 전화기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아무리 지금 당장 필요한 인력이 아니라고 해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백배는 나았다.
만약에 확실한 사람이라면 없는 자리를 만들어서라도 데리고 있어야 했다.
한참이나 고민하던 제이슨은 인터폰을 눌렀다.
“스카우트 팀 좀 보자고 해주세요.”
아무래도 제대로 조사를 해야 할 것 같았다.
***
며칠 뒤.
밤에 수선 가게에 나와 있던 우진은 휴대폰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바비에게 사진을 써도 된다는 허락까지 받았건만, 촬영 이후로 매튜가 연락이 안 되고 있었다.
자신이 편집 자체를 할 줄 몰랐기에 매튜가 맡았다. 그래서 모든 것들이 매튜에게 있었고, 우진은 기다려야만 했다.
그때 잠잠하던 휴대폰이 드디어 울렸다. 우진은 급하게 받았다. 상대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매튜였다.
반가운 목소리로 가게에 있다고 알리자 근처에서 전화를 걸었는지 목소리가 들리며 가게 문이 열렸다.
가게로 들어오는 매튜의 모습에 우진은 할 말을 잃었다.
며칠 동안 뭘 했는지 가뜩이나 마른 사람이 더 말라 보였다.
백인의 피부임에도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와 거무죽죽해 보일 정도였다.
그럼에도 하얀 이를 내보이며 씨익 웃는 매튜였다.
“선생님, 앉아도 되겠습니까?”
“아, 네. 앉으세요.”
툭 건들면 쓰러질 것 같은 몸으로 짐까지 바리바리 싸 들고 온 그는 바닥에 앉더니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그러고는 노트북이 켜지자 영상을 재생시켰다. 우진도 의자에서 내려와 바닥에 앉아 노트북을 봤다. 노트북의 검은 화면에 TV에서 많이 듣던 클래식 음악이 나왔다.
“바흐 무반주 첼로곡 1번 프렐류드입니다. 파블로 카잘스의 앨범이라 저작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 걱정은 하지도 않았던 우진은 멋쩍게 고개를 끄덕였다.
화면은 미리 들은 대로 미자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커피숍 유니폼을 입은 모습이더니, 화면이 잠시 깜빡이자 메이크업을 하고 있는 모습으로 변했다. 그리고 또다시 깜빡이더니 머리를 틀어 올린 모습이 나왔고, 잠시 뒤 긴 머리를 한 미자의 모습이 잡혔다.
계속 깜빡이는 게 신경 쓰였지만 다음에 무슨 장면이 나올까 은근히 기대도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검은 화면이 다른 때보다 1초 정도 길게 느껴졌다.
그러더니 언제 촬영했는지 화면을 뚫어져라 보는 미자의 모습이 보였다.
패딩을 천천히 벗는 모습이 나왔고, 패딩이 내려가는 모습만 천천히 화면에 잡혔다. 분명히 이때까지만 해도 그 촬영본으로 이런 영상을 만들어낸 매튜가 존경스러웠다.
잠시 뒤 화면이 올라가더니, 미자가 원래 카운터 안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커피를 내리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다시 화면이 바뀌더니 영어로 하나씩 글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Change.
Change of Fashion.
Change of Life.]
그리고 화면에는 커피를 내미는 미자의 모습이 나왔고, 이어서 다시 글씨가 새겨졌다.
[Infinity of Jin’s.]
[I.J]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