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 국가들은 투명하고 합의적 의사결정 시스템, 그리고 정치 조직들과 시민 간의 친밀한 관계로 명성이 높다. 실제로 이들 국가에서는 대통령이나 총리가 시민들과 어울려 커피를 마시고 일상적으로 시장을 방문하거나 특별한 경호 없이 영화나 콘서트를 보러가는 모습이 어색하지 않다. 장관이나 국회의원들도 전철과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하는 풍경이 자연스러우며, 국회의원들은 별다른 특권을 갖지 않고 직접 법안을 작성하고 연설문을 준비하는 것이 당연한 관례가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나라들 또한 현대 대의 민주주의가 당면한 구조적, 질적 도전들을 경험하고 있다는 점에서 완전히 예외인 것은 아니다. 실제로 1970년대 이래 북유럽 정당 민주주의와 복지국가들에서도 경제적 위기와 불확실성, 사회구조와 정치적 균열 구조의 변동, 새로운 정치 세대의 성장 등으로 인해 중대한 도전 과제들이 생겨났다. --- p. 49
핀란드는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아이슬란드와 함께 북유럽 국가의 일원으로서 정당 중심의 강한 대의 민주주의 시스템을 운영해왔으며, 최근에는 다양한 정치적 · 사회적 혁신의 선두에 서 있는 나라이다. ‘동과 서 사이에’ 위치한 독특한 지정학적 조건으로 인해 지난 세기 독립(1917)과 내전(1918), 대소 전쟁(1939~1944), 전후 복지국가 건설, 소련 해체 직후의 경제위기, 유럽연합 가입(1994) 등 격동하는 역사적 과정을 겪은 핀란드는 1980년대 말부터 지속적이고 단계적인 헌법개혁을 통해 대통령, 의회, 행정부 간의 권력구조를 재조정했다. 특히, 1999~2000년의 전면 헌법개혁을 통해 기존 1919년 헌법의 준대통령제 아래에서 강력해진 대통령의 권한을 대폭 줄이고 대신 의회와 총리의 권한을 강화함으로써 표준적 의회주의로의 전환을 실현하였다. (중략) 이와 더불어 핀란드 의회인 에두스꾼따(Eduskunta)도 의회 절차를 더 투명하게 개선하고, 물리적 · 디지털 접근성을 강화하는 등 다양한 개혁 조치를 취해왔다. --- p. 30~31
영국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의회 등 ‘논쟁하는 의회(debating parliaments)’와 대척점에 있는 북유럽의 ‘일하는 의회(working parliaments)’는 본회의장에서의 화려한 논쟁보다 위원회 단계의 실용적 검토와 합의적 문제해결을 중시하는 운영 규칙들을 발전시켜왔다. 에두스꾼따도 북유럽 의회의 일원으로서 의원들이 본회의 연설보다 위원회 법안 심사에 주력하는 입법 문화를 발전시켰다. 반면, 논쟁하는 의회에서는 본회의장에서 정부를 비판하는 야당의 역할이 강조되며, 갈등적 정치문화가 보편적이다. ‘일하는 의회’ 테제가 보여주듯이 위원회는 에두스꾼따의 척추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위원회 회의는 대개 비공개 상태로 개최되며, 이는 건설적 주장과 여야를 포함한 정당들 간의 정치적 협력을 위한 중심 공간을 제공한다. --- p. 211-212
중간매개적인 시민사회 단체들과 그 대표들의 광범위한 입법 협의 참여는 틀림없이 인상적이고 긍정적인 것으로, 결사체 민주주의와 높은 수준의 사회적 신뢰를 특징으로 하는 북유럽 민주주의의 근원적 정치과정을 잘 보여준다. 인구 550만 명 규모의 핀란드 사회에서 한 해 평균 수 천회 이상의 의회-시민사회 간 입법 협의가 일어나고 있다는 점은 국회의 입법 심의 과정 자체가 부실한 한국 민주주의의 상황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준적 입법 협의 기제에 대한 과도한 의존은 입법 심의 과정에 대한 더 개방적 · 포용적 · 직접적인 형태의 시민 접근성을 제약한다. 이는 오늘날 새로운 민주정치의 환경 속에서 의회 의사결정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을 증가시킬 수 있다. 물론, 확립된 형태의 대의 민주주의와 새로운 형태의 시민 참여 정치를 조화롭게 화해시키는 것은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니다. 필요한 제도적 개혁을 디자인하고 실행하는 과정에서 위원회 투명성과 효과성 사이의 ‘상쇄 효과’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혁신적이면서도 균형적(통합적)인 접근이 매우 중요하다. --- p.266
공중의 접근이 어려운 입법 과정의 엘리트주의적 측면을 고려할 때 시민발의 제도는 최근 핀란드 민주주의 역사에서 일어난 중요한 변화 중 하나이다. 입법 의제설정에 시민참여를 확대하기 위한 이 직접 민주주의적 채널은 핀란드 정부의 위로부터의 혁신 프로젝트에 의해 주도됐다. 핀란드 시민발의 제도의 빠른 공고화와 제도 실행 이후 창출된 새로운 정치적 다이내믹은 무난한 합의를 통해 제도 도입에 찬성했던 대다수 정치엘리트들의 일반적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을지 모른다. 대의 민주주의의 전통적 개념과 정치적 결정을 숙의하는 에두스꾼따의 헌법적 권리에 대한 강한 신념이 핀란드의 정치적 기구들과 엘리트들을 오랫동안 지배해왔던 것을 감안할 때 시민발의 제도는 여러 측면에서 기존의 관습적 사고를 흔들고 있다. --- p. 332
2019년 총선에서 당선된 의원들의 평균 연령은 기존 47.3세에서 46세로 더 낮아졌다. 연령대별 의원 수를 살펴보면, 30세 이하 8명(4%), 30-44세 88명(44%), 45-64세 94명(47%), 65세 이상 10명(5%)로 나타난다. 곧, 45세 아래 연령의 의원들이 96명(48%)으로 나타나며, 20-35세 사이의 국회의원도 38명으로 19%에 달하였다. 선거가 끝난 뒤 핀란드 미디어들은 젊은 당선자들의 이력과 스토리를 상세히 전하고 있는데, 그 중 가장 어린 24세의 리리스 수오멜라(Liris Suomela)의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그녀는 필자가 유학한 땀뻬레(Tampere) 대학교에 재학 중인 대학생으로 18세이던 2013년에 녹색당에 가입한 뒤 2017-2018년에 녹색당 청년조직 대표를 역임했다. 현재 땀뻬레대학교 이사회 임원이자 땀뻬레시의회 부의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중략) 청소년 시기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선호하는 정당의 청년조직에 가입하고, 학생자치활동 및 지역사회 참여 경험을 거쳐 중앙 정치 무대에 대표로 성장해가는 북유럽의 정치 문화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 p. 358-359.
현 단계 한국 민주주의는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정치적 비전과 의지에 기초한 제도적 정치개혁을 필요로 한다. 특히 극단적으로 낮은 수준에 머무는 의회의 공적 신뢰 수준을 높이기 위한 지속적 의회 개혁 노력이 요청된다. (중략) 최근 국회가 점차 공간을 시민들에게 개방하고 디지털 관여를 확대하는 등 일부 긍정적 변화가 나타나고 있으나 전반적으로 볼 때 여전히 시민 친화적 ‘외양’을 갖추는 수준에 머무는 것으로 판단된다. 투명하고 접근 가능한 의회 공간 · 문화 · 시스템을 만들고, 입법 과정에 광범위한 시민사회 협의 프로세스를 가동하는 한편, 온라인 청원 · 시민발의 · 숙의적 ‘미니퍼블릭’ 등 혁신적 참여 기제를 적극 실험 · 제도화하며, 포용적 대표를 실현하고 지속가능한 정치공동체의 미래를 열어가는 명실상부한 시민적 대표 기구로 거듭나기 위한 입법자들(국회 기구와 국회의원들을 모두 포함)의 개혁 의지와 헌신이 절실히 요청된다.
--- p. 3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