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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전 오기영 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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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9년 05월 18일
쪽수, 무게, 크기 1988쪽 | 152*225*80mm
ISBN13 9791188765409
ISBN10 118876540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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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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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권 사슬이 풀린 뒤
수년래 조선 내 지하운동의 지도인물 김형선(金炯善)을 체포하였다고 실려 있었다. “이 사건에 관련되는 것이 아니오?” 하는 눈치로 내가 형님을 바라볼 때에 형님은 그렇다는 듯이 빙긋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나서,“소가 잡혔어!” 하였다. “소가?” 하고 나는 다시 그 주먹 같은 굵은 활자로 나타난 김형선이라는 이름을 보았다. 그리고 그 부드럽고 온순하나 그 눈에 불길이 일던 소를 생각하였다. 산골짜기 샘물이 바다가 된다는 혁명 의욕을 말하던 소를…. 예감은 기묘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한 동생은 신의주감옥에 있고 또한 동생은 부산감옥에 있으니 자기는 필시 서대문감옥에 갈 것만 같다고 하던 그 소가 정말 서대문감옥을 가게 된 것이다. 그 소가 바로 이때에 철창 속에 들어가서 14년 후 이 땅에 해방이 와서 감옥문이 열리고야 비로소 세상에 다시 나온 김형선이었다. 8년 징역을 살고 난 뒤에 오히려 전향을 아니 한 죄로 다시 예방구금(豫防拘禁)에 걸려 그대로 감옥 속에 파묻혀 있기 6년 만에 해방과 함께 옥중생활이 끝나는 지독한 운명을 출발하는 소식이 이 신문 기사였다. --- pp.118~119

(형님-오기만은 오기영의 집을 처음 방문한 날) 오래간만에 계수가 정성을 기울인 저녁을 자시고 담배를 피우며 상해에서 붙들리던 광경, 그동안의 감옥살이, 병감 오방으로 넘어간 지 한 달 동안에 그 속에서 죽은 사람이 네 명, 그중 한 명은 밤중에 죽는데 가족을 못 보고 죽는 것이 서럽다고 하도 울어서 달래느라고 애쓴 이야기, 그 눈물이 질적질적한 눈을 감겨 줄 때 고맙다는 말을 채 끝내지 못하고 숨이 지더라는 이야기, 그 시체 옆에 누워서 그 밤을 지나고 이튿날 조반을 먹은 뒤에야 시체를 내가더라는 이야기, 또 한 명은 자다가 어느 때 죽었는지 아침에 깨어 보니 눈은 흡뜨고 입을 쩍 벌린 채 굳어 버렸기에 “이런 친구 봤나, 날 좀 깨웠더면 눈이나 감겨 줬지.” 하였더니 다른 병자가 얼굴을 찡그리고 “혼자 애쓰다 죽었구려.” 하더라는 이야기도 하였다. “나도 그 꼴이 되는가 했더니…!”라고도 말하였다. “저이가 노상 한 주일 동안을… 울구 다녔답니다.” 하고 아내가 목이 메어 말끝을 흐릴 때에 형님은 내 얼굴을 바라보며 “내가 한번 그런 꿈을 꾸었다.”고 대답하였다. --- pp.151~152

형님이 잡혀 다니고 내가 잡혀 다닐 때에는 그다지 괴로운 줄도 몰랐더니만 손아래 아우(오기옥)가 잡혀간 뒤에 처음으로 나는 마음의 아픔을 느꼈다. 비로소 과거에 어머니가 얼마나 마음 아프셨을까를 알았다. 한 주일 전까지도 처녀였던 계수가 차입할 남편의 옷 보퉁이를 들고 나서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나 가엾었던지 ‘비밀 있는 녀석이 장가는 왜 가?’ 하고 한 처녀의 운명을 저질러 놓은 아우가 얄밉게도 생각되었다. (…) 더구나 며칠 전에 놓여나온 누이가 겪은 바에 밥이라고 준다는 것은 먹다가 굶어 죽을 지경인데, 미리 붙들린 아우의 관계자들이 그 몹쓸 매를 맞고 유치장에 돌아와서 정신을 잃고 헛소리를 하다시피 응 응 하는 소리에 모두 소름이 끼쳤다는 말을 듣고는 마음을 가라앉히려야 가라앉힐 수가 없다. 그래서 누이는 어떻게든지 아우를 끌어내올 도리를 차려 보리라고 애를 썼다. 맡아서 취조하는 형사를 찾아보고 사정도 해 보는 모양이요 부탁할 만한 데가 있음직한 내가 그냥 가만있는 것이 불만하기도 한 눈치였다. 그러나 누이의 이러한 생각과 그 행동이 나에게는 몹시 불쾌하였다. --- pp.214~215

이렇게 지긋지긋한 하루하루가 한 달이 지난 뒤에 8월 15일이 왔다. 바라고 바라던 일본 항복의 소식을 들은 것이다. 가슴은 그냥 울렁거리고 어떻다 말할 수 없는 감격을 누를 수 없는 채 자전거를 빌려 타고 서울로 달려오고 있는 나의 얼굴에는 땀만 흘러내리는 것이 아니다. 눈물이, 그저 눈물이 자꾸만 흘렀다. 라디오 방송으로 일본의 항복을 알았을 뿐이라, 서울은 패잔병의 어떤 발악이 일어나고 어떤 혼란이 있을지 모른다는 의심도 없지 아니하지마는 필경 오늘내일쯤 아우와 조카는 감옥에서 놓여나올 것이라는 생각에 한 시각이 바쁘다. 더위에 목이 타건마는 주막에서 물 한 모금 얻어 먹기가 바빠서 그대로 자전거를 달리는 것이다. 열한 살 적의 기미년 생각, 그때 내 볼기짝을 후려치던 보조원의 짐승 같은 얼굴, 그담에도 몇 번이나 겪은 그 염라국 사자 같은 녀석들의 잊을 수 없는 얼굴, 기미년에 갓 나서 방긋방긋 웃던 아우의 얼굴, 지금 옥중에서 하얗게 되어 가지고 나올 아우의 얼굴, 조카의 얼굴, 관뚜껑을 열어젖히고 내려다보던 형님의 얼굴, 숨지기 한 시간 전까지 혁명을 말하던 매부의 얼굴, 이 모든 아픔에 지칠 대로 지쳐 버린 어머니의 얼굴, 내가 잡혀갔다 놓여나올 때마다 나보다 더 상하였던 아내의 얼굴…. 이 여러 가지 얼굴이 자꾸만 앞에 어른거려서 자전거는 돌을 피할 생각도 못 하고 덜그덕거리면서 달리는 것이다. 땀인지 눈물인지 분간할 수 없이 짜디짠 물이 자꾸 입술에 스치는 것이다. --- pp.223~224

○ 제2권 민족의 비원
나는 흥사단 사건(興士團事件)*으로 나의 천직이라 믿었던 신문기자의 직업에서 추방될 때에 당시 총독부 경무국장(警務局長)이던 미하시(三橋)로부터 “장차 무엇을 하겠는가?” 하는 질문을 받고, “조선이 독립하면 다시 한 번 신문기자를 하리라.”고 대답한 일이 있었다. 미하시는 경무국장다운 금도(襟度)를 보이느라고 나의 대답을 탓하지는 않고 다만 연민의 웃음을 띠
며 “아마 꿈일 것이라.” 하였다. 그 꿈같은 독립을 누릴 기회를 얻었고, 동시에 이것은 나의 염원이던 신문인으로서 재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염원을 보류하고 일 회사(一會社)의 병졸(兵卒)로 나섰다. 해방 직후 일인(日人)의 손에 파괴되어 황폐해진 생산 부문의 재건을 위하여 일졸오(一卒伍)로서 정신(挺身)해 볼 의욕에 불탔던 것이다. --- pp.19~20

남조선에서 미운 사람을 치는 가장 간단하고 용이하며 또 즉효를 내는 방법이 ‘아무개는 빨갱이’라는 일언(一言)으로써 족하게끔 되어 있다. 빨갱이면, 적어도 빨갱이 비슷한 자면 권력도 이를 미워하고 폭력도 이를 뚜드리려고 든다. 이것이 정말 빨갱이만을 가려서 그러할 때에도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별도의 정치적 입각점(立脚點)에서 비판할 여지가 있거니와 우에 대하여 충고적 비판을 보내는 사람까지도 좌의 비(非)를 비라고 하는 것은 좋으나 우의 비를 비라고 하면 빨갱이와 동률(同律)로 취급하려 드는 것은 이 땅에서 자유주의의 양심까지를 탄압 배격하는 것밖에 아무것도 아니다. --- p.41

○ 제3권 자유 조국을 위하여
자유, 이 조국의 자유를 위하여 우리는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으며 투옥되었던가. 그런데 우리에게는 아직 자유가 없다. 미국의 자유도, 소련의 자유도 모두가 조선의 자유는 아니다. 하물며 독재와 착취가 있고서는 외형이야 어떻거나 실질에 있어서 진실된 자유의 세계는 아닌 것이다. 외세와 공식(公式)을 믿는 사람들이 무엇이라 비웃을지라도 나는 저 미국보다, 소련보다 더 좋은 자유의 조국을 단념하지 못한다. 밖으로 양강(兩强)의 간섭을 물리치고 안으로 민족적 입장에 귀일(歸一)할 때에 우리에게는 독재와 착취 없는 새 나라의 건설이 가능하다고 나는 믿는다. --- pp.12~13

실제 지금 조선에서는 남의 자본주의와 북의 공산주의가 사생을 걸고 싸우고 있다. 그러나 이 때문에 희생되는 것은 무엇인가? 조선 민족이다. 조선민족의 자주독립이다. (…) 이제 우리가 세워야 할 새 나라는 어느 일 계급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실로 진실로 새 나라는 어느 일 계급의 것일 수는 없는 것이다. 하물며 어느 일 세력의 것일 수는 없는 것이다. 더구나 어느 일당(一黨)의 것일 수는 없는 것이다. 새 나라는 인민 전체의, 자유로운 인민 전체의 것이라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민 전체의 진정한 자유가 보장될 수 있는 진리를 찾아야 한다. 지금 같은 혼돈 속에서, 이 허다한 과오 속에서 진리를 찾는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우나 또 지극히 중요한 일이다. 이 진리를 찾기 위하여 우리에게는 냉철한 이성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지금 상호 투쟁에 열병적(熱病的)인 사람들이 열등시하는 그 냉철한 이성이 필요하다. 좌우의 고집과 편견이 설혹 어떤 비난과 공격의 화살을 보낼지라도 우리는 새 나라는 자유체(自由體)라야 할 것을 굽힐 수는 없는 것이다. 제국주의라 파쇼라 자본주의라 하는 독재도 부당하거니와 이른바 진보적이라 하는 무산계급의 독재도 부당한 것이다. 누구나, 어떤 개인이나 국가와 권력에 대하여 비판자가 될 수 있어야 할 새 나라는 결단코 개인의 사상의 자유나 언론의 자유가 억압되어서는 부당하다. 그러므로 국가의 권력 그것은 용인하나 이는 개인의 모든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권력으로서 용인하는 것이다. 소수파의 의견도 경청하며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며 사상을 통제하려 들거나 내지 구속하지 아니하는 권력을 용인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는 실제에서 개인의 자유 활동에 유해한 부의 편재를 수정할 필요가 있다. 여기 토지개혁, 중요 산업 국유화 등의 경제적 민주평등이 요청되는 것이다. --- pp.31~32

○ 제4권 - 삼면불
“과거 일본의 제국주의는 거짓이나마 일본적이기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우방은 우리의 자주독립을 도와주려는 것뿐이요, 우리에게 가식적인 친선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군 후예 본연의 자태에 돌아가 자주독립의 완수를 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거늘 이름은 한국무슨당, 조선무슨당 하며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위한 정당임이 분명하면서 ‘조선말 하는 또 다른 외국사람’은 있지 아니한가. 당리당략도 있고 국리국책을 생각하거든 망국의 원인이 어디 있었던가를 기억할 것이다. (… ) 자당(自黨)의 사이비 애국자에는 후하고 다른 당의 비이사(非以似) 친일자에는 박한 비난이 과연 가혹한가. 민족을 반역한 자, 친일 분자는 물론 있었다. 나라를 팔아서 40년 영화를 누린 자, 억압자에게서 위임받은 채찍으로 동포를 때린 자, 동지를 적에게 헐값으로 방매한 자, 이권을 위하여 적에게 웃음을 판 자, 창씨를 강요한 자, 제국주의 전쟁에 노예군 편성을 애원하고 청년 학도에게 피의 공출을 선전한 자, 북해도 석탄갱 속으로 청장년을 들어다가 매장한 자 등등. 이들의 처단은 마땅하다. 그러나 슬프지 아니한가. 누가 광영의 임무를 맡을 자격이 있는가. 나는 무엇이 달랐는가…. 허위를 벗는 마당에 도달하여 마땅히 참회하지 않으면 안 된다.(1945.10.29.) --- pp.199~200

○ 제5권 - 3면 기자의 취재 : 일제강점기 기사
우리의 상공계는 너무도 고요하다. 몰락하는 도성의 석양과도 같이 아무런 동요가 없고 진취가 보이지 않는다. 점포는 즐비하고 공장은 다수(多數)한 상공 도시의 평양도 그러하다. 10전짜리 물건 한 개를 사고자 하여도 신시가의 일본 상인을 찾는다. 어떤 상인은 한탄하되 “조선 사람은 조선 사람을 신용치 않는 모양이지요.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의 격으로 같은 값이면 일본인이나 중국인에게서 물건 사는 것을 일종 만족으로 아는구려!” 과연 얼마나 답답한 탄식인가! 나는 이 소리가 어쩐지 조선 상인의 최후의 신음소리와 같아서 듣기에 몹시도 슬펐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새로운 길을 개척할 여지가 있다. 우리 상공계의 번영을 위하여서 취할 바 수단과 강구할 대책이 아직도 많이 있는 것이다. 신시가로 향하는 고객의 발길을 그대로 구시가에 머물게 할 방침이 많이 있는 것이다. 동시에 이 모든 것을 위하여 평양의 상공업자는 일치한 보조(步調)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 p.44

○ 제6권 - 류경 8년 : 일제강점기 칼럼
그러나 이제 말하려고 하는 것은 결코 그네의 강연 내용이 어떠하든지 그것을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다. 어떤 책임적 지위에 있는 사람도 아니요, 다만 그네의 심리적 경향을 표시한 데 불과하므로, 우리는 그네의 생각하고 있는바, 그네의 향하려고 하는 바를 고찰하여 더욱 각성하는 바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빈약한 양말공장, 빈약한 고무공장, 사진업 같은 것도 벌써 그네는 경쟁적 심리를 가지고 보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토착인이다. 토착한 사람이니만치 외래의 어떤 사람이든지 침입하지 못할 만한 견고한 실력을 양성하여야 하겠다는 것을 말하여 둘 뿐이다.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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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기자 출신으로서 본인과 전 가족이 참가한 가족독립운동사요 민족사회의 독립운동사이기도 한 오기영 선생의 저술 『사슬이 풀린뒤』가 1948년에 간행됨으로써 필자와 같은 당시의 중학생들에게는 거의 유일한 독립운동사 교재가 되었다. (…) 민족 구성원 전체가 남쪽 편과 북쪽 편, 그리고 좌편과 우편으로 나누어지다시피 한 해방정국 상황에서 “너는 우도 아니요 좌도 아니요 대체 무엇이냐, … 혹은 중간파라, 심하게는 기회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스스로는 자유주의자로 자처한 한 지식인이 불행했던 일제강점기와 극도로 혼란스러웠던 해방정국을 산 생생한 체험기록들이야말로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전체 민족사회의 귀중한 교과서라 할 것이다.(…) 오기영 선생은 ‘네번째의 8·15를 지내고 닷새 뒤’ 그러니까 1948년 8월 20일 이승만정권이 성립된 5일 후에 쓴 저서 『사슬이 풀린 뒤』를 간행하는 머리말에서 이렇게 썼다. “무엇이 달라진 세월인가? 똑바로 따지면 다르기는, 1945년 8·15 이후 잠깐일 것이다. 도로아미타불이라면 심한 말일까? 전날에 내 형을, 내 매부를 죽게 하였고, 내 아버지를, 나를, 내 아우를, 내 조카를 매달고 치고, 물 먹이고 하던 그 사람들에게 여전히 그런 권리가 있는 세상이다.” 그러고는 1949년 어느 때인가 오기영은 고향이 있는 북한으로 갔고, 그후 북녘의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 과학원 연구사 등을 역임했다. 그분이 남긴 저작물과 기고문을 통해서 민족사의 시련기였던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을 산 한 사람의 양심적 지식인이요 빼어난 언론인이 이 땅의 사람과 민족을 위해 무엇을 생각하며 또 어떻게 살았는가를 이제 찬찬히 살필 수 있을 것이다.
- 강만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전 위원장)
오기영이 말하고 또 말하고 거듭 말하는 것이 있다. 자주성이 그것이다. 김규식은 친미반소도 반미친소도 민족적 통일 단결을 파괴하는 노선이며, 친미친소만이 자주성을 견지해 통일 독립에 이르는 길이라고 역설했다. 오기영은 미국도 소련도 한국이 따라야 할 모범국가가 절대로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는 분단정부가 들어서는 1948년에 약소민족의 자주권, 생존권이 냉전의 도구로 희생되고 있으며 남북 조선이 미소의 전초기지로 화해 골육상잔의 참극이 연출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래서 남북협상을 열렬히 성원하면서, 김규식이 “흥해도 우리 손으로 흥하고, 망해도 우리 손으로 망하자”고 절규하며 “남북협상은 독립운동의 막다른 골목이다”는 비절(悲絶)한 심정을 토로하자, 그것은 전민족의 심정이요, 자신의 심정이 될 수밖에 없다고 피력했다.
- 서중석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3·1운동 백주년을 맞이하는 오늘날, 당신이 그토록 원했던 ‘자유주의자’ 오기영이 남긴 글들을 알알이 엮어 세상에 내어놓을 수 있는 시대에 마음껏 감격하고 싶습니다. 이 책들이 새로운 평화의 시대에 알곡이 되기를 원하는 마음을 담아, 『동전 오기영 전집』을 우리들의 아버지와 어머니 영전에 고이 바치며, 이 지난한 작업에 공감하고 동참해 주신 여러 선생님들께 우리 가족을 대표하여 허리 숙여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 가족회고, 70년 만에 글로 적어보는 회고―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 오경애 _동전의 막내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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