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도는 가난한 사람들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안다. 가난한 사람이 많이 사는 영도에서 병원을 개업해 가난한 사람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수시로 의료봉사나 무료진료 등을 행한 것도 따져보면 젊은 시절 가난을 뼈저리게 체험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행도가 해동장학회를 만들어 학업이 어려운 학생들을 남몰래 도운 것도 가난 체험이 가져다준 선행으로 볼 수 있다. --- 「2부 3. 고학생(苦學生)의 의대 공부」 중에서
1979년에는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에 회사원들이 대거 가입하여 회원 수가 2만 명을 넘기도 했다. 그러나 국가가 시행하는 의료보험 정책이 확산되면서 1989년 6월 30일 청십자 의보는 20만 명의 회원을 국가 의료보험에 귀속시키고 설립 21년 만에 활동을 접었다. 발전적 해체였다. 해체를 앞두고 장기려는 “국민 건강을 위해 진실·사랑·협동의 청십자 정신을 실천했다는 데 만족한다”면서 전 국민 의료보험 실시를 반겼다.
청십자 의보 운동은 평소 누구나 공평하게, 차별 없이 진료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온 행도의 의료 철학과 통했고, 무엇보다 은사의 사업을 돕는 일이어서 행도에게 의미가 남다른 것이었다. --- 「3부 4. 청십자 의료보험 운동 」 중에서
장기려가 평생 신봉한 삶의 키워드는 ‘진실’과 ‘사랑’, 그리고 ‘성실’이었다. 이를 위한 공동체라면 그는 신앙과 관계없이 동의할 수 있다고 했다. 그가 평생 이룬 업적과 의사로서의 실천에 누구나 감동을 받는 것은 그가 끊임없이 비기독교인들과 소통하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이 같은 스승의 삶은 행도에게 깊은 두드림과 울림을 안겨 주었다. 그런 스승을 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 다시 생각해도 가슴이 떨려온다. --- 「3부 5. ‘바보 성자’에게서 배운 것 」 중에서
초창기 해동의원에는 영도지역 주민들이 주로 찾았다. 진료실은 늘 만원이었고 정이 넘쳐났다. 의원을 찾아온 환자들은 자신의 아픈 곳은 물론, 집안의 대소사도 흉허물 없이 얘기하곤 했다. 어떨 땐 진료실이 동네 사랑방 같았다. 행도는 나이 드신 환자들의 얘기를 끈기 있게 경청해 주었다. 사실 아픈 것은 2할이 의학적 요소 때문이고, 나머지 8할은 마음의 병이라고도 한다. 그러니 얘기를 잘만 들어줘도 낫는 환자가 있는 것이다. --- 「4부 1. 월세로 시작한 외과의원 」 중에서
왕진비는 자주 구멍이 났다. 어렵게 사는 환자에겐 왕진비를 정상적으로 받기 힘들었다. 자연 왕진 봉사가 많아졌다. 가만히 지켜보니 못사는 집, 열악한 가정에서 큰 병에 걸리는 경우가 더 많았다. 어떨 땐 왕진비를 받기는커녕 “맛있는 거 사 먹어라”며 가진 돈을 주고 올 때도 있었다. 왕진을 통해 만나는 환자들은 누구랄 것 없이 금세 이웃이 되었고, 동병상련의 처지가 되어 서로를 쉽게 이해했다. --- 「4부 3. 왕진의 추억」 중에서
옥상의 장독들은 보기만 해도 마음이 푸근해지고 냄새라도 맡을라치면 그냥 군침이 돈다. 국과 반찬 맛은 장맛에서 비롯된다는 믿음이 있기에 박 여사는 힘들어도 매년 장을 담는다고 했다. 신선한 재료,국산 음식, 그리고 정성이 결합되니 환자와 보호자들이 맛있게 밥을 먹는 건 당연하다. 환자들이 잘 먹으니 병원의 직원들도 덩달아 잘 먹는다. 하루 평균 1,000여 명이 이 밥을 먹고 있으며, 온라인에는 ‘해동병원 밥맛 좋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나돈다. --- 「4부 6. 병원 식단과 연지추어탕 」 중에서
4월 혁명이 일어난 배경은 단순하지 않다. 자유당 정권의 폭정과 부정선거가 직접 원인이 되었지만, 그 배경에는 미국의 경제 원조를 매개로 하는 모순적 종속경제, 메카시적 반공 이데올로기를 통한 정치적 억압, 학문의 자유 제한 등의 문제가 깔려 있었다. (...중략) 행도는 이때 민주민족청년동맹의 학원부장을 맡아 민주화 운동에 가세했다. 흔히 ‘민민청’이라 불린 이 단체는 전국 규모의 조직이었다. 일찍이 『자본론』 등 사회과학 서적을 읽으며 의식을 다져나갔던 행도는 ‘시대적·역사적 부름’이라 생각하고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 「5부 2. 4월 혁명과 ‘민민청’ 활동」 중에서
“Free”. 해동병원에는 독특한 환자가 적지 않았다. 행도는 친한 지인이 찾아오면 진료를 하고 나서 진료확인서에 곧잘 “Free”라는 사인을 해 원무과에 내려 보냈다. ‘진료비를 받지 말라’는 무언의 지시였다. 부산의 재야 민주 인사들 가운데는 해동병원에서 진료한 뒤 행도가 사인한 “Free”란 표시를 받은 이들이 적지 않다.
무료 진료가 많아지자 병원 살림을 살아야 하는 사무장들이나 원무과 직원들은 볼멘 하소연을 해댔다. “Free”가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도는 “그 사람들은 살림이 어려운 분들이다. 우리가 도울 수 있는 건 그것뿐이다”면서 진료 후원을 마다하지 않았다. 민주 인사들에 대한 진료비 ‘공짜(Free)’는 그냥 공짜가 아니라 대의명분 있는 ‘값진 후원’이라는 것이 행도의 신념이었다. --- 「5부 5. 재야인사들의 사랑방 」 중에서
1969년 병원을 처음 열면서부터 내세운 게 있다. ‘가족처럼 따뜻하고, 친구처럼 믿음직한 환자 중심 병원’이다. 이는 지역사회에 봉사하고 사랑을 실천하며 보건의료 연구에 매진한다는 약속이자 다짐이기도 했다. 해동병원의 원훈인 ‘친절·성실·봉사’는 이를 압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행도는 더 나은 사회, 아픔이 없는 세상을 꿈꾸었다. 그 속에는 힘센 자, 돈 많은 자도 더러 있었으나, 힘 없고 빽 없고 가난한 사람들이 더 많았다. 인정은 영도 봉래산 자락의 산복도로나 달동네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맛 봤다. 무료 진료를 받은 꼬부랑 할머니가 그 다음날 고맙다며 가져온 삶은 고구마를 잊을 수가 없다. 돈보다 소중한 마음의 정이었다. 치료비를 깎아주자 한 장애인은 절룩거리는 다리로 박카스 한 박스를 사들고 와서 고마움을 표했다. 하고 보니, 이게 지역사회 공동체였다.
--- 「6부 못 다한 이야기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