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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미선 | 로담 | 2012년 07월 20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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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2년 07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384쪽 | 128*188*30mm
ISBN13 9788997253425
ISBN10 8997253425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관련자료 보이기/감추기

저자 : 서미선
우울한 날에 행복을 주는
로맨스 소설을 쓰고 싶은 사람.
오늘도 행복하지만,
내일은 더 행복해지고 싶은 평범한 아줌마.

대표저서
『혈왕』,『추락』, 『여배우』,『위험한 복수 』외 다수.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비켜 주시겠어요?”
“싫은데.”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는 상우를 말리려다 말고 엄 회장은 두 사람을 지켜보는 쪽을 택했다. 언젠가부터 세상사에 무심하기만 하던 손자가 정원의 무심한 행동을 보면서 감정의 변화를 조금씩 보이고 있었다. 누구라도 좋았다. 살아 있으되 살아 있지 않은 손자에게서 사람의 냄새를 풍겨주기만 한다면 상대방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줄 수 있었다.
“도련님!”
“내가 왜 그쪽 도련님이야? 다른 사람은 모르는데 댁이 그러는 거 진짜 짜증나. 나이도 쥐꼬리만큼 먹으면서, 노친네 흉내 그만 내고 그냥 이름으로 불러.”
고개를 떨어트리며 한숨을 내쉬는 정원의 모습에 더 이상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아무래도 그가 나서 이 사태를 정리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상우의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노친네 가만히 있어. 나 지금 열 받았거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상우가 정원의 팔을 거칠게 잡아챘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일은 그 다음이었다. 찰싹하는 소리가 서재 안에 울려 퍼졌고 상우의 뺨 위에 손바닥 자국이 나 있었다. 귀한 손자가 맞았다는 사실보다 정원이 사람을 때렸다는 사실에 놀라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서재 안은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뒤이어 집 안을 뒤흔들 정도로 큰 목소리가 들렸다.
“하, 날 쳤니?”
“그래, 쳤다. 왜, 너도 한 대 치려고? 칠 수 있으면 쳐.”
고개를 빳빳이 들고 상우 앞으로 다가가는 정원의 모습에 엄 회장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정원의 이런 거친 반응은 처음이었다. 있는 듯 없는 듯 그저 그림자처럼,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고 지금껏 살아가고 있던 그녀였는데 갑자기 손찌검을 하다니……. 직접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믿지 못할 광경이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녀석의 얼굴, 씩씩거리는 숨소리. 거리를 좁혀 오는 정원을 보며 순간적으로 뒤로 물러서는 손자를 보자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까불지 마세요, 도련님! 참아 주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안 참으면 어쩔 건데?”
“내가 어떻게 할 것 같으세요?”
“너, 할아버지 믿고 그러나 본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의 입가에 비웃음이 어렸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냉혹함이 묻어나는 미소였다.
“엄 회장님을 믿는 것은 제가 아니라…… 도련님이시잖아요. 만약, 엄 회장님의 손자만 아니었다면…….”
정원은 뜸을 들인 뒤 숨을 들이마셨다.
“나이를 먹었으면 나이 값을 해야지. 도련님을 지켜주는 든든한 빽이 없다면 저한테 감히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전 도련님에게 고용된 게 아니라, 엄 회장님에게 고용된 사람이란 것을 잊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널 쫓아내고 말겠어.”
이를 가는 그의 말에 정원이 어깨를 으쓱했다. 두 사람이 자주 부딪치기는 했지만 언제나 무시했는데 결국 오늘에서야 폭발하고 말았다. 얌전한 줄 알았던 정원이 대들고 나서자 제아무리 배짱 좋은 녀석도 동요한 게 분명했다.“그렇게 마음먹은 것처럼 쉽지 않을 겁니다.”
“내가 못하는 것은 없어.”
“맞아요. 그러니까 어린애처럼 자기 마음에 들지 않은 상대한테는 이런 식으로 제멋대로 행동하죠. 아직 어른이 되려면 멀었다는 증거를 아주 확실하게 보여 주었으니, 저 역시 어린애한테 하듯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녀의 말에는 엄 회장에 대한 약간의 비난도 담겨 있었다. 여느 때라면 울분을 토했을 녀석인데 분노를 억누르는 것을 보며 엄 회장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가 보겠습니다.”
정원은 할 말을 다 했는지 인사를 하고 그대로 나가 버렸다.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엄 회장은 이내 시선을 손자에게로 향했다. 불끈 틀어쥔 주먹은 당장이라도 주위의 모든 것을 부서 버리고도 남을 만큼 강렬한 분노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냥 보고 있을 거야? 당장 내보내!”
“내가 왜 그래야 하는지 말해 봐.”
“노망났어? 좀 전에 나한테 하는 짓 못 봤냐고!”
“한 비서 말, 하나도 틀린 거 없는데.”
“노친네 정말 이럴 거야? 저 여자 안 내보내면 내가 나갈 거야.”
그냥 위협이 아니었다. 언제나 그렇듯 집을 나가서 제 마음대로 돌아다니다가 때가 되면 돌아올 것이다. 돌아올 날이 기약이 없어서 그렇지……. 예전 같으면 당연히 손자의 말에 따랐겠지만 아예 못 들은 척 해 버렸다. 믿어지지 않는 눈으로 보고 있는 녀석에게 씨익 웃자 녀석이 눈을 흘긴다.
“한 비서가 너한테 철이 덜 들었다고 하잖니.”
“내가 어린애야!”
“그러게. 나만 어린애라고 생각한 줄 알았는데…….”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말하는 게 얄미웠는지 녀석이 사납게 소리치듯 물었다.
“설마 저 여자하고 잠자리했어?”
“점점…….”
“그런데 왜 안 내보는데?”
어째 수준이 저 모양일까. 엮을 사람이 없어서 새파랗게 젊은 한 비서와 그를 엮으려 하다니…….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하기 싫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나가 봐.”
“노인네가 젊은 여자를 데리고 있으면 뻔하지 않아? 어디 사는 누군지도 모르면서 지금까지 데리고 있었는데,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야?”
“무슨 사이면 어쩔 건데!”
버럭 소리를 내지르자 녀석이 충격을 받았는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그를 보았다. 조금씩 눈에 냉기가 어리더니 경멸에 가까운 어조로 말했다.
“두 사람 절대 안 어울려.”
“어울리든 안 어울리든 상관없어. 알다시피 난 누구보다 돈이 많은 남자거든.”
“남자 좋아하시네. 낼 모레면 팔십이잖아.”
손자의 말에 설마 하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정원을 여자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정을 쉬 주지 않는 성격이었고 외골수적인 성격은 집안 대대로 이어지는 혈통과도 같았다. 지금껏 물어 본 적은 없지만 상우의 가슴 안에 여자가 있단 생각이 들었다.
“네 할아버지 나이, 네가 말한 나이로 보는 사람 없다. 많이 봐야 칠십이야. 아직도 밖에 나가면 육십 대 중반에서 후반으로 보는데?”
“노친네 정력 좋은가 보네. 설마 지금까지 그게 서는 것은 아니겠지? 정력 좋은 할아버지라고 불리고 싶어서 지금 그러는 거야?”
거르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하는 투에 정말 말 그대로 할 말이 없었다. 누군가 뒤통수를 세게 내려친 것처럼 멍하니 바라보자 손자 놈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낄낄거리며 웃었다. 아무래도 킥을 제대로 먹여야겠다는 생각에 웃는 얼굴로 말했다.
“늙어도 남자는 남자지.”
“진짜 서?”
“엄상우!”
휘익하고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대단하신 분이야.”
“용건은 그게 아닐 테고, 하고 싶은 얘기가 있을 텐데?”
녀석의 얼굴에 장난기와 경멸, 빈정거림이 짙은 먹구름처럼 드리워져 있었는데 어느 순간 그런 모습들이 보이지 않게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그제야 서재로 들어온 이유가 생각났는지 일인용 소파로 걸음을 옮기더니 다리를 꼬고 앉았다.
“방금 전에 나간 여자, 나 줘.”
이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관심이 있는 건 알았지만 그냥 한집에 사는 여자로만 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자신이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과 동시에 등줄기로 한기가 타고 흘러내렸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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