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를 시작할 때 제대로 된 도구부터 준비해야 한다. 비싸겠지만 장기적인 시각으로 보면 득이다. 특히 식칼은 날이 잘 들고 좋은 것으로 용도에 맞게 몇 종류 갖춰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런 사고방식에 나는 반대다.
지당하신 말씀이긴 하지만, 실제로 그런 걸 따지다가는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한다. 이런 엄격주의는 사람들의 의욕을 잃게 할 뿐이다.
---「주방에서 흉기를 다루는 법」중에서
생산(채취·포획)부터 소비(조리)에 이르는 과정에 일관되게 관여하는 것이 바람직한 건 알겠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소재의 신선도를 얘기하고, 신선한 재료에 하나하나 소금을 뿌리며 좋은 요리로 만드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이미 잃어버린 날에 대한 향수, 이룰 수 없는 꿈에 대한 갈망일 뿐이다.
신선한 참치라고 해도 인도양 중간쯤에서 잡은 뒤 바로 냉동(이라는 보존 처리)해서 운반되어 온 것이리라. 그것을 해체 작업한 것에 손을 대나, 횟감 덩어리가 된 뒤에 칼을 대나, 별 차이 없지 않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고 투덜거리며 불평하기보다, 어쨌든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일단 생선회라도 썰어 볼까」중에서
슈퍼에서 팩으로 포장한 무채나 해초가 깔린 생선회를 사 와서 집에서 간장에 찍어 먹는다. 혹은 근처 가게에서 사 온 고구마튀김을 간장에 찍어 손으로 집어 먹거나, 채소 가게에서 토마토를 사 와서 소금에 찍어 먹는다.
이런 식으로 가게에서 파는 것을 사서 그대로 먹으면 적어도 ‘요리를 했다’고 으스대지는 않는다. 그래도 남(물론 아내도 포함해서)이 만든 요리를 그저 수동적으로 먹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먼저 자신이 먹을 것을 직접 조달하려는 정신. 이것이 결국은 그를 요리로 이끌 것이다.
직접 사 온 고구마튀김이 그대로 먹기에 너무 크면 칼을 들고 둘로 자를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간장을 찍어서 먹는다면? 그 행위는 횟감용 생선을 사 와서 썰어 먹는 것과 대체 어디가 다른가. 후자가 ‘요리’라면 전자도 ‘고구마튀김 회’를 만든 게 되지 않을까(물론 ‘회’라는 것이 재료를 날로 먹는 것이긴 하지만). 적어도 절대 직접 먹을 것을 사러 가지도 않는 사람은 큰 고구마튀김을 봐도 그걸 잘라서 먹을 생각은 하지 않는다. 거기에서부터 차이가 생긴다.
---「우연한 사건에서 요리는 시작된다」중에서
연회석에서 나베 요리가 나오면 게이샤나 젊은 종업원이 하나부터 열까지 서빙을 해 줘서 입을 아 벌리고 먹여 주기만 기다리는, 새끼 새도 아니면서 어미 새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이들이 자주적으로 냄비에 둘러앉아 먹는 것을 자립의 첫걸음으로 삼았으면 한다.
자신이 먹으려는 것을 직접 집어서 냄비에 넣는다. 그것이 익을 때까지 스스로 책임지고 관리하는 것이 포인트다. ‘아까 넣은 내 조개 어디로 가 버렸네’ 하면서 냄비를 마구 휘젓는다면 관리 능력이 별로 없는 것이고, 자신이 재료를 보충하지 않고 안에 있는 것을 멋대로 훔쳐 가는 행동은 설령 상사여도 규탄받아야 할 자세다.
나베 요리 먹는 법 하나로 그 사람의 성격부터 사회인으로서의 능력까지 알 수 있다.
---「레스토랑이라는 스태미나 음식」중에서
이 ‘재료를 어떻게 맛있게 요리할까?’ 하는 것이 요리라는 행위의 바람직한 발상이다. 완성(변형)된 음식 이미지에서 거슬러 올라가 재료(원형)를 찾기보다, 눈앞에 있는 현실의 재료를 두고 이걸 찌면 어떨까, 구우면 어떨까…… 같은 상상력을 발휘하는 편이 훨씬 자연스럽고 또 실제로 요리하기도 편하다.
손에 들어온 재료를 어떻게 조합해 어떤 조리법(이것도 가짓수는 정해져 있다)으로 처리할지 궁리하는 것이 요리다.
요리는 ‘주어진(선택한) 자료를 어떻게 조합할까’ 하는 일종의 정보 처리 퍼즐이다.
---「“오늘 뭐 먹지?”가 아니라 “이것으로 어떻게 먹지?”」중에서
애정을 강매하거나 강요할 것 없이,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몸을 보양하기 위해 스스로 요리를 만드는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기로 하자.
남이 먹어 주고 만들어 주기를 바라니까 요리가 의무가 되고, 무거운 짐이 되고, 그 불만이 ‘애정’이라는 이름으로 폭발하는 것이다. 골프나 테니스를 잘 치고 싶으면 자발적으로 연습하러 갈 테고, 연습하면 조금씩 늘 것이다. 맛있는 요리를 먹고 싶으면 마찬가지로 직접 연습하면 된다. 요리는 애정이라기보다 오히려 먹겠다는 의지다. 아니, 맛있는 것을 먹고 싶다는 마음은 정열이다. 정열도 애정의 일종이 아니냐고 묻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만약 ‘요리는 애정이다’라는 명제가 성립한다면, 그 애정의 형태는 페티시즘이거나 나르시시즘이다.”
---「다시 태어난 크레이머 씨를 위한 요리론」중에서
남자는 잡다한 집안일에 관여해서 안 된다, 남자는 부엌에 들어가면 안 된다, 부엌에서 밥을 하다니 남자 체면 떨어진다, 같은 인식이 굳어졌다. 남자는 자신의 생활환경을 스스로 정리하는 데 등을 돌리고, 나라를 위해, 회사를 위해, 가족을 위해…… 등등 ‘모든 타인’을 위해 자신의 힘과 시간을 쏟게 되었다.
그 결과는? 비참하게도, 바깥일은 잘하는지 모르지만 자신의 일은 무엇 하나 자기 손으로 하지 못하고, 달걀 프라이 하나 제대로 못하는 ‘사생활이 부자유스러운 인간’들이 돼버렸다.
---「남자의 진화론」중에서
‘남자니까’, ‘여자니까’라는 옛날 체면이나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 잡다한 지식도 남자의 요리도 죽었다. ‘남자니까’, ‘남자도’가 아니고, 한 사람의 온전한 생활자로서 가볍게 주방에 서서 어떤 것이든 맛있게 만들어 먹는 소양을 익히자.
잡다한 지식을 액세서리로 삼거나 폼 잡기 위해 요리를 할 게 아니라, 매일의 생활 속에서 자기 자신의 몸을(그리고 틀림없이 정신도) 형성하는 일상의 음식을 자신의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자신의 스타일에 맞는 모양으로 디자인하고 싶은 사람들.
이 책은 그런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남자의 진화론」중에서
처음 요리하는 사람에게 무엇이 가장 힘드냐고 물으면 간 맞추기라고 한다. 물론 썰고 조리는 등의 요리 과정도 힘들지만, 어떻게든 배울 수 있다. 하지만 소금 분량이나 간장 분량을 적절히 안배하는 것이 아무래도 어렵다고 한다. 의외이지 않은가?
평소 집에서나 가게에서 남이 만든 요리를 먹을 것이다. 싱겁다, 짜다, 맵다, 불평도 하면서 어느 정도의 간이 적당한지 먹어 보면 알 거라고 생각하지만, 막상 직접 해 보면 잘 모르게 되는 것 같다. 이 일례를 봐도 먹는 경험이 만드는 기술에 직결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대로 만드는 경험은 먹는 데 도움이 된다. 혹은 평소에 요리하는 사람이라면 남이 만든 요리를 먹는 일이 자신의 요리에 꽤나 도움이 된다. 요리하는 즐거움을 안다는 것은 먹는 즐거움을 배로 만든다.
---「지금도 나는 매일 요리를 만들고 있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