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느끼는 중력은 모두의 것이나 또한 나만의 것인 양 무겁고도 가볍다. 잠시만 이곳에 머물렀으니 됐다. 다시 떠나야 한다, 떠나야만 한다.” ---「프롤로그」중에서
“이 막사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은 바람 소리였다. 들판의 흔들리는 옥수숫대, 나무의 잎사귀, 새들의 지저귐 사이로 굽이돌던 바람은 막사의 지붕을 오르내리며 구멍 난 벽을 이리저리 비집고 들어왔다. 바람은 머리카락과 콧구멍 사이를 숭숭 스치듯 달아났다. 마치 ??오즈의 마법사??의 회오리바람처럼 나는 사방에서 침입하는 바람을 어찌할 수 없었다. 하지만 무엇도 바람에 실려 가지 않았다. 간이건조대에 걸어 둔 하얀 수건도, 접이식 의자도, 장화도, 70kg의 내 몸도, 여전히 막사 속에 있었다. 다만, 정처 없는 마음만이 문틈으로 살며시 빠져나가 광야에서 길을 잃었다. 나는 Stratford 역에서 20분가량 떨어진 농장에서 해가 지는 방향을 바라보며 서성였다. 그러다 어둠에게 노크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가끔 올려다 본 하늘에서는 여전히 별이 빛나고 있었다.” ---「2. 옥수수 껍질 까기, 좋은 콩 골라내기」중에서
“나는 사흘에 걸쳐 페르 라셰즈, 몽파르나스, 몽마르트르, 이 세 개의 묘지를 걸었다. 그리고 여러 번 길을 잃었다. 나를 움직였던 예술가들의 죽음 앞에서 이런저런 말을 걸고 서성이기도 했다. 숨을 참은 채였다. 그들은 내게 어떤 말도 건네지 않았고, 어떤 길도 찾아주지 않았다. 죽은 자는 말이 없었고, 누워만 있었다. 그 단단한 침묵 앞에서 나는 끝없이 묻기만 했다. 대답은 없었다. 그게 다였다. 그들의 묘비에서, 그 세계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숨을 한껏 몰아쉬며 파리의 차가운 공기를 더없이 마셔댔다. 나의 발걸음은 그들에게서 멀어지며 더욱 가벼워졌다. 파리의 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저 숨을 들이마시듯, 나를 받아들였다.” ---「5. 숨의 발견」중에서
“그는 주저 없이 내게 그 기타를 건넸고, 나는 얼떨결에 기타를 받았다. 나는 연주를 할 수 없을 거 같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는 말없이 내 손가락이 움직이길 기다려주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어디선가, 어둠 깊숙한 곳에서 동물들이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려왔다.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맥주병을 부딪치는 소리가, 나뭇잎이 서로의 몸을 부비는 소리가, 별들이 하늘 위에서 반짝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입 꼬리가 슬며시 올라가는 게 보였고, 나의 손가락은 그 미소를 지휘 삼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12. 산의 소리」중에서
“나는 그가 두고 간 설계도면을 펼쳤다. 그의 글씨 속에는 그의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뜨리 싸우전 원 헌드레에드. 뜨리싸우전 원 헌드레에드. 특유의 스패니쉬 잉글리시 억양에는 그의 십구 년이 담겨 있었다. 나는 십구 년 전에 낯선 나라에 와서 그가 닦아 냈던 접시를 생각했다. 그도 접시가 되는 생각을 해보았을까. 나는 그가 원하는 길이의 프레임을 잘라냈다. 귀마개를 단단히 했는데도, 날카로운 쇳소리가 한참이나 귓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14. 우울 따윈 집어 치우고, 닥터」중에서
“왜 음악을 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왜 차가운 도로 위에서 누구도 들어주지 않는 연주를 해대고 있는가. 트램이 다가오는 소리는 점점 커졌다. 나는 페이드아웃 없는 이 장면에서 콘센트를 뽑아 버렸다. 1mm의 철로를 다시 잡지 않는다면 인생의 철로가 뒤틀어지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아직 거리로 나갈 준비가 되지 않았다. 이토록 시린 겨울을 음표라는 철창 속에서 헤매고 있을 뿐. 빠앙. 트램의 클랙션이 울렸다. 나는 잠에서 깨어나는 중이다.”
---「Tram의 운행이 중단되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