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러졌다.” 도현은 테이블에 엎드린 채 작은 숨을 쌕쌕 뱉어내는 선우를 보았다. 내리 두 시간을 스트레이트로 마셔대더니 결국 알코올 기운을 이겨내지 못하고 눈을 감고 말았다. 선우가 이렇게 약해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이래도 되는 거야, 당신? 내 앞에서 이렇게 무방비해도.” 도현은 왼손으로 턱을 괴고 오른손은 테이블 위로 올렸다. 선우를 보는 눈매가 점점 깊어졌다. 고개를 살짝 기울이니 눈을 감은 선우의 얼굴이 확연하게 박혀왔다. 짧은 머리칼이 흩어져 볼이며 눈썹을 뒤덮고 있었지만 그녀의 얼굴을 그려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오른손이 조금 더 앞으로 전진 했다. 손끝에 선우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닿았다. 도현은 그 손끝을 물끄러미 보다가 조금 더 앞으로 뻗어 그의 반절밖에 되지 않는 작은 손을 덮었다. 슬며시 입가에 웃음이 고였다. 두 시간 동안 멀거니 앉아 선우의 잔에 술을 채워주고 그녀를 편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그에게 갑자기 다가온 것처럼 선우는 갑자기 쓰러졌다. 그 마저도 의외성이 넘쳐 좋기만 했다. “후후.” 작게 웃은 도현은 자신의 손과 겹쳐진 선우의 손을 흡족하게 바라보았다. 그가 일방적으로 그녀를 잡은 적은 몇 번 있었지만 모두 잠깐일 뿐이었다. 이렇게 오래도록 잡아 본 적은 없었다. 눈을 낮게 내리깐 채 그 조용한 시간을 음미하던 도현은 선우가 몸을 살짝 움직이자 눈을 크게 떴다. 곱게 뻗은 눈썹이 찌푸려지는 모양을 보니 이 여자는 꿈에서도 그렇게 차게 날을 세우나 보다. 도현은 선우의 얼굴을 바라보다 몸을 앞으로 기울여 그녀의 얼굴 가까이 다가갔다. 살짝 벌어진 입술 새로 여린 숨이 밭게 뱉어졌다. 와인으로 인해 살짝 젖어 있는 입술에서 달콤한 향이 흘렀다. “이건 유혹인데.” 작게 중얼거린 도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 위로 몸을 완전하게 실었다. “아무 짓도 안 한다고는 했지만 남자는 모두 짐승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쉽게 믿으면 안되지.” 피식 웃은 도현은 선우의 짧은 머리칼을 살짝 쓸었다. 보기보다 매끄럽고 부드러워 손을 떼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난 거짓말을 아주 잘해. 남선우.” 도현은 선우의 붉은 입술을 보며 낮게 뇌까렸다. 한 번 먹어보고 싶다. 화홍 사과처럼 달디 단 과즙이 꿀처럼 흘러나올 것 같은 저 입술을. 이처럼 강한 욕망을 느껴보긴 처음이었다. 선우가 뱉어내는 숨결에서 마지막으로 마셨던 쇼비뇽 블랑의 짙은 과일향이 맴돌았다. “나중에 알면 죽이려 들겠지?” 도현은 작게 중얼거리며 얼굴을 내렸다. 순간 선우가 입맛을 다시듯 입을 오물거리자 그녀의 입술이 그의 입술에 살짝 닿았다 떨어졌다. 도현은 더 이상 생각하기를 접었다. 곧 바로 선우의 붉은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 지그시 누르고 살짝 부풀어 오른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머금은 후 감질나게 비볐다 뗐다. 도현의 시원하게 뻗은 눈매가 주책없이 휘며 해사한 웃음을 물었다. 입술이 닿은 것만으로도 온 몸이 바짝 긴장해 심장 근육까지 움칫거릴 정도였다. “뭘 후회할 거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도현은 테이블을 돌아 선우의 곁에 다가섰다. 다시 한 번 머리칼 깊숙이 손가락을 넣어 부드러운 감촉을 음미했다. 앙증맞은 귀가 손바닥에 들어왔다. 선우를 바라보는 도현의 눈매가 깊어졌다. “뭐가 됐든 간에 너무 늦었어.” 보드라운 볼을 쓸고 가는 목덜미까지 손이 뻗어갔다. 도현은 선우를 안아들었다. 가는 목을 추슬러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게 한 후 무릎 밑으로 손을 받쳐 침대까지 옮겨 조심스레 뉘이고 이불을 가슴까지 덮어주었다. 신뢰도 상승을 위해 선우에게 한 약속은 지킬 생각이었다. 건드리지 않겠다는. 도현은 옆으로 삐져나온 선우의 손을 들어 이불 안으로 넣어주려 했다. 그러다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딱딱한 이물감에 고개를 숙여 살폈다. 아마도 소방 일 때문이겠지만 고와야 할 선우의 손바닥은 굳은살이 이곳저곳 박혀 있었다. 이 단단한 손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구해 온 것일 터다. “정말 넌…… 대단한 여자야.” 낮게 웃은 도현은 선우의 손바닥을 부드럽게 여러 차례 문지르다 이불 안으로 넣어 주었다. 또다시 저 새침한 입술을 맛보고 싶지만 단지 닿는 것만으로는 멈추지 못할 것 같아 말간 얼굴만 물끄러미 응시했다. 가게로 나가봐야 하는데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보고만 있어도 가슴 한켠이 뿌듯하게 차오르는 포만감은 그로서도 처음이라 어색하기만 했다. “잘 자. 남선우.” 도현은 선우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주고 곧 몸을 일으켜 돌아섰다. 선우의 입술에서 맴돌던 짙은 과일향이 그에게 옮겨왔듯 그녀를 향한 그의 마음이 선우에게 옮겨가기를 바랐다. 그가 이 삶을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남선우가 필요했다. 이미 그의 심장은 그녀가 움켜쥐고 있었다. 도현은 현관 앞에서 다시 한 번 선우를 돌아보고는 집을 나섰다. 남선우는 그의 영역에 들어와 있다. 본래 재규어(Jaguar)라는 동물은 한 마리의 암컷을 차지하기 위해 목숨을 불사하는 싸움도 마다하지 않는 공격형 짐승이다. 그리고 무는 힘이 강해 한 번 문 먹이는 절대 놓치지 않는다. 그는 남선우를 절대 그의 영역 밖으로 내보낼 마음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