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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류장에 선 그대에게

정류장에 선 그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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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9년 06월 05일
쪽수, 무게, 크기 408쪽 | 382g | 128*188*30mm
ISBN13 9791163021902
ISBN10 1163021903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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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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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당연히, 모든 순간을 기억하며 살 수 없다.
“뭐, 자기가 가고 싶다는데 어쩌겠어.”
어느 형태, 어느 영상, 어느 느낌만을 기억할 뿐이다.
“좋은 일 하러 가잖아.”
기억을 돌이켜 보면, 나는 제3자가 되어 그때의 나와 상대방을 굽어보고 있기도 하고, 내 시야에 비추던 1인칭 시점을 사진처럼 간직하고 있기도 하며, 뭐 한마디로 말하면 뒤죽박죽이었다.
“나는 희우 오빠가 없어도 살 수 있지만, 오빠는 오빠가 없으면 살 수 없는 사람을 위해 떠나는 거니까.”
비가 오고 난 뒤였고 어스름이 깔려 있었던 것 같다. 사실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냥 기억하고 있는 영상이 그랬다. 중앙 도서관 앞이었고, 도서관의 불빛이 그 애의 뒤로 아스라이 비췄던 기억이 난다. 그 애의 앞에서 과 후드를 입고 삼선 슬리퍼를 걸친 내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너도 희우 형이 없으면 괜찮지 않은 것 아니냐고, 내 생각에도 말 같지 않은 소리를 하는데,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 짝사랑 중인 20대 초반의 남자가 할 수 있는 말은 사실, 다 바보 같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때 내 감정을 갈무리하기에도 바빠 멋있는 말을 포장하는 법조차 몰랐다.
“희우 오빠가 없는 건 괜찮지. 내가 애도 아니고.”
밤이슬을 맞은 풀냄새가 코를 찔렀고, 이상한 벌레가 수풀 속에서 울었다. 내가 했던 말은 기억이 나지 않는데 리연이의 귀 밑으로 내려오던 짧은 단발머리와, 아직도 어색한 화장, 발목까지 길게 내려오던 회색 치맛자락, 담담했던 목소리는 여전히 선명하다.
“나를 떠나는 것이 괜찮은 희우 오빠가 안 괜찮은 거지.”
그 순간이 사실은 가장 우리다운 순간이었다. 쓸쓸한 그녀의 눈매를 보며 나는 더 쓸쓸해졌다. 내가 희우 형이라면 너를 절대 혼자 두지 않을 텐데. 그냥 내게 오면 안 되겠니? 어디서 많이 들어 본 것만 같은 단순한 대사가 입안을 맴돌다가 결국 다시 마음속 깊이 내려앉았다. 너는 내 앞에서 그런 표정을 짓고, 나는 또 멍청하게 친구라는 이름으로 곁에 있어 주기만 한다.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더 좋아하는 사람은 기다릴 수밖에 없으니까. 그 사람을 놓을 자신이 없으면 견뎌야지 뭐 어쩌겠니? 어차피 내게는 선택의 여지도 없는데, 네게 징징거리고 싶지도 않아.”
그녀는 항상 맞는 말만 했다. 어쩔 수 없는 감정만 넘쳐나고 언어의 표현이 부족했던 나는 그녀의 말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었다. 나도 너를 기다릴 수밖에 없고, 견디는 것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으며, 그 누구에게도 징징대지 못하는 나만의 고통이라고.
“그래도 고마워. 친구가 이럴 땐 최고다.”
그때의 너는 너무 어려서 나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사실은 남자 친구가 오랫동안 해외 봉사를 떠난다는 말에 아무 마음 없이 기숙사에서 슬리퍼 차림으로 뛰어나오는 남자인 친구는 없는데. 아마 고통으로 일그러진 나의 표정도 너는 읽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항상 그래 왔듯이 장난처럼 말했다.
“야, 형 없어서 방학 때 심심하면 언제든 연락해. 불쌍한 서리연한테는 언제든 밥 사 줄 테니까.”
“동정은 됐어. 이참에 혼자 틀어박혀서 글이나 쓸 거야.”
다시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은 쓸쓸했다. 나는 핸드폰을 괜스레 열어 아까 희우 형에게 온 메시지를 읽고 또 읽었다. ‘나 방학 동안 봉사 간다. 리연이 심심할 텐데 가끔 밥 좀 먹어 줘.’ 이 남자는 리연이가 심심할 것이 마음 쓰일 정도로 그 애를 좋아하고, 남자인 나한테 단둘이 밥을 먹으라고 할 정도로 그 애에게 무심했다.
길고 긴 방학 내내, 리연이는 내게 연락 한 번이 없었다. 어차피 그 애는 누군가에게 기댈 정도로 약한 여자애가 아니었으니까. 나는 제발 내게 기대기라도 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할 정도로 그녀가 좋았지만…….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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