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으로, 아크로이드는 역사서와 예언서의 영향, 정경의 발전, 초기 유대교와 기독교 해석가들의 히브리 성서 재사용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런 학문적 관심사는 통찰력 깊은 연구 성과물로 이어졌다. 다행히 아크로이드의 전문 분야 중 특별 기념 논문집으로 출간된 출판물은 두 개의 개별 모음집으로 다시 출간되었다(1987; 1991). 본서의 기고자들, 특히 에스케나지, 크라츠, 마이어스(Meyers)는 아크로이드의 저작에 대해 언급한다. 이 논문들은 아크로이드의 출판물이 출간되던 당시와 수십 년 후에 어떻게 수용되었는지에 대한 심도 깊은 정보를 위해 반드시 읽어 보아야 할 것이다. 피터 아크로이드의 바벨론과 페르시아 시대 연구를 위한 공헌은 중요하고 영원할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기반으로 삼아 연구하고 있을 때조차 이런 선구적인 노력을 쉽게 잊어버리곤 한다. 아크로이드 이후 연구 분야의 일반적 동향은 변화되었다(아래 아스케나지의 논문 참조). 그러나 아크로이드의 저작은 지금 우리가 당연시 여기는 많은 변화를 일으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아크로이드 자신의 방법론과 다를 뿐만 아니라 그가 살던 시대의 관습과도 분명히 다른 새로운 방법을 도입하는 데 일조를 한 것은 바로 그의 저작 방법이었다. 본서에 포함된 논문들은 우리 모두가 피터 아크로이드에게 빚을 지고 있음을 매우 분명하게 드러내는 데 일조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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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다니엘의 기도는 설명을 해 달라는 간구가 아니라, 다니엘로서는 나라 전체를 대신하여 회개하는 엄청난 시도이다. 3-19절의 다니엘의 긴 고백 기도는 예레미야, 레위기, 신명기를 쫓아 포로지로부터 회복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참회의 기준을 개인적으로 맞추고자 하는 시도이다. ‘그의 죄와 백성의 죄를 위한’기도를 드릴 때, 다니엘은 출애굽기 32:30-34을 연상시키는 중재자적 자세를 취하고 있다. 거기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의 전형적인 예언자로서(신 34:10) 참회하지 않는 백성을 위해 자비를 구하고자 주님의 목전에서 자신이 받고 있는 존경심을 활용하고 있다. 다니엘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가브리엘의 신탁은 좋은|나쁜 소식을 보고하는 것 같다. 좋은 소식은 다니엘의 기도가 들렸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과 거룩한 도성에 자비를 다시 베푸실 것이다. 나쁜 소식은 백성과 도성의 회복의 시기가 7의 배수로 연기된다는 것이다. 즉, ‘70주’인데, 이는 정확하게는 ‘70이레’로 이해할 수 있다. 이제 가브리엘은 회복 예언의 성취가 왜 연기되는지를 분명하게 설명하지 않지만, 다니엘 9장과 레위기 25-26장 사이의 상호 텍스트적 관계 연구는 가브리엘 메시지 이면의 ‘주석적 논리’를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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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레반트가 페르시아 시대에 관리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 지역이 기존의 신바벨론식 구획에 따라 조직되었는지, 아니면 새로운 조직 구조와 지위를 얻게 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학자들은 이 쟁점에 침묵하지 않았다. 한편 호글룬트(Hoglund, 1992: 21)는 아케메니드 당국이 기존의 신바벨론 속국들을 영토적으로, 행정적으로 재구성하였다고 본다. 다른 한편, 반더후프트(Vanderhoo, 2003)는 예후드를 사례로 사용하면서, 신바벨론의 철수, 대립, 파괴 정책은 영토의 어떤 행정적 조직도 포함하지 않았고, 이런 상황은 바벨론 통치 말까지 이런 식으로 지속되었다고 본다. 신바벨론의 남레반트 피임명자 중 어느 누구도 고대 유대 자료 외에서는 알려진 바가 없기 때문에, 반더후프트의 제안은 설득력이 있다. 그의 해석에 따르면, 신바벨론 시대의 레반트는 일반적으로 도외시되었다. 이는 물질문화가 제시한 증거를 근거로 학자들이 확증할 수 있는 결론이다(Stern, 2001: 308, 312-31). 조사 결과를 근거로 하여 추가하자면, 후에 페르시아 당국은 즉각적으로 페니키아 도시 국가를 느슨한 연합체로 조직하였고, 이는 기원전 6세기와 5세기의 첫 사분기 동안 지속된 형태였다. 기원전 482년 크세르크세스가 바벨론의 반역을 진압한 후(Olmstead, 1948:237 n. 23; Lipschits, 2006: 25), 이 연합체는 페르시아의 군사 조직에 공헌한 것을 인정받아 시돈의 공식적 지도력 아래 페니키아 도시 국가 연맹으로 전환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5세기 말과 4세기 초에, 도시 국가 시돈은 페르시아의 세금과 지배로부터 보다 큰 독립을 확고히 하고자 몇 가지 조치를 취하였다. 아마도 기원전 464-454년경 페르시아 제국에 맞선 이집트 반란에 많은 영감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ucydides, History 1.104; Briant, 2002: 573-7 참조). 시돈의 이런 움직임의 결과는 처참하였다. 시돈 왕 테네스의 반란은 분쇄되었고, 아닥사스다 3세는 이 도시를 파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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