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뒤쫓아 나갔으나, 이미 아버지가 담을 넘는 소리가 쿵 하고 들렸다. 나도 오줌을 누기 위해 일어났다. 마당에 내려가서 땅이 언 꽃밭에다 소변을 보자 그제서야 아니나 다를까, 호각 소리가 들렸다. 잡아라! 저쪽이다! 활터 쪽이다! 순사들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언 하늘을 속속들이 후벼파며 연달아 총소리가 들렸다. 죽여라, 죽여! 쏴 버려! 순사들의 고함이 점점 멀어졌다. 나는 후들후들 떨며 소변을 마쳤다.
어느 사이에 나는 울고 있었다. 잉크빛 하늘에 외롭게 걸린 달을 보며 나는 소리내어 울었다. 찬 뺨에 뜨거운 눈물이 줄기줄기 흘러내렸다. 왜 아버지는 죽어야 하는지, 그는 왜 스스로 목숨을 걸고 도망만 다녀야 하는지, 나는 그것을 알 수가 없었다. 오직 그러므로 해서 쑥대밭처럼 되어 버린 집안꼴이 서러웠다.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연민이 함께 뒤섞여 나의 눈물을 강요했다. 바람을 타고 먼 산에서 여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 p.28
아직도 이런 절망에 익숙한 사람이 있을까? 아직도 이런 암울함을 자기의 것으로 삼고자 하는 사람이 있을까? 이제 처음 발표되었을 때로부터 거의 25년, 30년의 세월이 지난 뒤에 김원일의 초기 작품들을 다시 읽으면서 갖게 되는 느낌이란 바로 이런 의문들이다. 20여 년 전 처음 읽을 때 그 절망과 어둠은 많은 사람들에의해 공유될 수 있는 고통스러운 시대적 체험이 육화된 것이라 여겨졌었는데.....
필자에게 있어 김원일 소설과의 만남은 남다르게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필자가 김원일의 소설을 처음 접한 것은 1970년대 후반 무렵의 일이다. 당시 그의 소설에서 무엇보다 강한 흡인력으로 나를 빨아들였던 것은 바로 그의 소설의 어두운 분위기와 절망의 암담한 색조였다. 시대적 상황의 탓이었건 필자 자신의 성격적 편향 때문이었건 술과 더불어 다소 위악적으로 살고 있었던 필자에게 김원일 소설의 어둠과 절망은 배경이나 구체적인 내용의 차이에 상관없이 수비게 나의 것으로 육화될 수 있었다.
--- p.329
아버지가 잡혔다는 소문이 온 장터 마을에 좍 깔렸다. 아버지는 어제 수산 장터에서 붙잡혔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젯밤 진영(進永) 지서로 묶여 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오늘밤에 아버지가 총살당할 거라고들 말했다. 지서 뒷마당 웅덩이 옆에 서 있는 느릅나무에 칭칭 묶여 총살당할 게 틀림없다는 것이다. 아니면 선바위산 묘지골로 끌려가서 총살당할 거라고들 떠들었다. 병쾌 아버지를 포함해서 아버지와 같은 짓을 했던 마을 청년들이 이미 일곱 명이나 총살을 당했기 때문에 아버지도 죽게 될 것이 분명하다. 이제 아버지는 한줌의 연기처럼 자취도 없이 사라질 게다. 그 사라진 연기를 다시 모을 수 없는 것같이 이제 우리 오누이들은 아버지라고 불러 볼 사람이 없게 된다.
--- p.213
부산으로 서울로 무슨 일 때문인지 나다녔다. 한 달 또는 두 달씩 집을 비우다가 불쑥 나타나서 며칠을 못 있다 다시 떠나곤 했다. 집에 있을 때도 어떤 책인지는 모르지만 가지고 온 두툼한 책만 열심히 읽었다. 어머니는 이모한테 말한 적이 있었다. 갑해 애비가 아마 그때부터 그놈의 사상인지 뭔지에 미쳤나 봐요. 사람이 어떻게 그토록 변할 수가 있담. 참, 사람일은 알 수 없어. 사람이 벙어리가 아닌 다음에야 그렇게나 말이 없을 수 있겠어요. 며칠을 꼼짝 않고 지내다간 온다간다 말도 없이 사라져 버리니 미쳐도 보통 미친 게 아니란 말이에요
--- p.74
배 속에서 쪼르륵 소리가 난다. 참 이상하지, 배가 고프면 그런 소리가 나거든. 정말 못 참겠다. 생각을 하지 말자. 밥 생각일랑 잊어버리자. 오늘도 점심을 굶었지. 찬길이 녀석은 참 좋겠다. 매일 도시락에 쌀밥을 가득 싸오니. 그러나 난 찬길이보다 공부를 잘 하지. 박선생이 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갑해야, 넌 가정 환경만 좋으면 정말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는데 하고 말했지. 그러나 난 학교도 오래는 다니지 못할 것야. 이모부가 언제까지나 내 학비를 대어 주지는 못할 테니깐.
- 아흔 아홉, 백, 벌써 백까지 세었군. 그런데 엄마는 나타나지 않는다. 나는 장터와 연결되는 다리 쪽으로 눈길을 준다. 나무다리는 이제 제 명을 다한 듯 싶다. 다리 바닥에는 군데군데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사람이 지나갈 땐 삐거덕 소리를 낸다. 달구지가 지나갈 땐 찌거덕 소리를 낸다. 그 다리 위에 만수 동생이 올챙이처럼 볼록한 배를 드러낸 채 혼자 제기차기를 하고 있다. 녀석네도 우리 집만큼이나 가난한데 그래도 오늘 저녁은 알차게 먹은 모양이다. 볼록한 배가 신이 나서
촐랑거린다. 우린 왜 이렇게 못 살까. 어머니 말처럼 모두 아버지 탓일 게다. 아버지가 그 짓을 하고 다녔기 때문일 게다.
--- p.6
나는 입과 코를 빼고 머리에 온통 붕대를 감은 박 소위를 볼 수 있었다.
놀랍게도 누나가 박 소위 윗도리 환자복 단추를 벗기고 있었다.
정은누나가 저러다니,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어쩌자는 거요?" 박 소위가 벽에 기대앉아 물었다.
정은누나는 말이 없었다. 어깨가 들먹이는 것으로 보아 누나는 소리 죽여 울고 있었다.
호롱불이 깜박거릴 때마다 두 사람 옆모습이 어른거렸다. 정은누나가 박 소위 환자복을 벗기자 수척한 맨살이 드러났다.
누나는 그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당신 아이를, 당신 아이를 갖고 싶어요. 그것뿐이에요......" 누나가 흐느끼며 말했다.
정은누나가 박 소위 윗몸을 껴안았다. 나는 목이 메었다. 저렇게 되는구나, 하고 나는 목울대를 들먹이며 중얼거렸다. 두 사람이 맺어지는 기쁨과 함께, 이제 정은누나를 박 소위에게 빼앗긴다는 게 나는 허전했다. 그 허전함은 비 내리던 날 강둑에서, 비에 젖은 옷을 통해 내 떨리는 살에 닿던 정은누나의 체취를 되살려주었다. 이제 두 번 다시 내게 돌아오지 않을 소중한 무엇이 내 몸 깊숙한 데서부터 빠져나가는 아픔에, 나는 눈시울이 화끈거렸다.
--- p.280-281
기관사는 시계를 본다. 8시 37분이다. 그는 계단을 올라 갑판으로 나선다. 선장실 쪽으로 발소리를 죽여 간다. 앞쪽을 바라보는 선장 뒷모습이 어둠 속에 어렴풋이 드러난다. 그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찌른다. 잭나이프가 만져진다. 그는 객실 겉문을 열고 계단을 밟는다. 술기운도 어느 사이 달아나버린다. 가슴이 뛴다. 계단을 내려와 객실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주머니 속 잭나이프 날을 편 뒤 손을 뺀다. 손바닥에 밴 땀을 바지에 문지른다. 객실 문을 열자, 여인과 중절모가 기관사를 본다.
"선장님이 보자는데요." 기관사가 중절모를 보고 말한다.
기관사는 다시 계단을 빫는다. 그는 반쯤 오르다 멈춰 뒤따르는 중절모 발소리를 듣자 다음 계단을 밟는다.
그는 중절모가 권총을 가졌음을 되새긴다. 중절모가 미처 손쓸 틈을 주지 않고 처치해 버려야 한다.
기관사가 갑판에 나서자 찬바람이 얼굴을 후려진타. 찬바람이 오히려 시원하다.
선장실로 두어 발을 떼어놓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뒤따르는 중절모를 본다.
--- p.115
갑해는 겨우내 새끼만 꼬는 판돌이네를 기웃거려 본다. 판돌이 어머니인 함안댁은 떡을 만들어 판다. 여기엔 어머니가 있을 것 같지 않다. 어머니가 함안댁에서 꾼 곡식을 갚지 않아서, 둘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갑해는 발길을 돌려 이모집에 간다. 이모네는 크게 술집을 한다. 어머니는 이모 집에 있었다. 갑해는 이모에게서 국밥을 얻어먹고, 어머니는 식량을 가지고 집에 돌아간다. 이모는 지서에 잡힌 아버지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보러 가라고 갑해에게 시킨다.
지서에 가자 이모부가 아버지는 벌써 죽었다며, 아버지 시체가 있는 곳에 갑해를 데려간다. 아버지의 시체를 보고 갑해는 어린 자신에게 큰 수수께끼를 남기고 죽어 버린 아버지의 일생 때문에 두려움을 느낀다. 그리고 무언가 깨달은 느낌을 가진다. 그 느낌은 꼬집어 내어 설명할 수는 없느나, 이를테면 살아가는데 용기를 가져야 하고 어떤 어려움도 슬픔도 이겨 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안개 속 같은 신기한 세상, 내가 알아야 할 수수께끼가 너무 많은 이 세상을 건너갈 때, 나는 이제 집안을 떠맡은 기둥으로서 힘차게 버티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느낌이다.
--- p.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