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다시 임시정부 청사로 갔다.
응접실에서 그들은 얼굴이 히멀끔하며 훤하게 생기고 양복을 입은 중년 신사와 만났다. 차 선생은 그분이 안 선생이라고 소개해주었다. 안 선생은 “들으니 자네들은 둘이가 다 중학 정도 학업을 수료했다는데” 하고 물었다. 두 소년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면 자네들은 공부를 더 계속하는 것이 좋다고 나는 생각하네. 집에서 매달 학비를 보내줄 수 있는 여유도 있을 것이라는 말도 들었는데. 여기는 물까가 싸서 한 달에 일본 돈으로 오 원만 가지면 공부할 수가 있어. 학비, 기숙비 다 합쳐서 말이지. 자네들처럼 중학까지 마친 청소년들은 공부를 계속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가장 적합한 독립운동이란 말야. 국내와 비밀 연락을 하다가 왜놈에게 잡히어 징역을 또 하기에는 자네들은 너무나 아까운 몸이란 말야. 국내와의 연락은 나이 늙은 사람도 할 수 있고, 소학교밖에 못 마친 사람들도 넉넉히 할 수 있는 일이야. 내 말 좀 명심해 들어보게. 가령 지금 당장 우리가 독립을 한다손 치더라도 독립국가를, 그것도 왕정(王廷)이 아니고 우리에게는 처음인 민주주의 국가를, 운영하기에는 각 방면의 기술자가 너무나 부족한 것이 실정이야. 기술자가 거의 없다싶이하고 또 문맹이 전 인구의 八할 이상을 차지한 현 상태에서 지금 독립을 해도 그 독립을 며칠 유지해나가지 못하게 된단 말야. 또 그리구 말일세, 정치적 독립만 가지구는 나라를 유지하지 못해. 경제적 자급자족과 군사적 방어의 힘이 뒤받침 못 해주는 한 자주독립 유지는 불가능하다는 말일세. 그러니까 자네들 같은 젊은이가 할 일은 공부를 더해서 실력을 길러야 한단 말일세. 가장 시급한 것은 농학, 응용화학, 교육학 등이고 그다음으로 군사학, 경제학, 정치학, 법학, 외교학, 이 모든 방면의 기술을 가진 사람이 적어도 몇만 명은 있어야만 우리나라 독립을 유지해나갈 수가 있다는 말이야. 그러니까 자네들은 자네들이 가진 소질과 취미에 따라 공부를 계속하는 것이 곧 독립운동일세. 지금은 학기 중간이 되어서 학교에 입학은 못 하지만 사월 셋째 학기 초에는 입학할 수가 있어. 그동안 무엇보다도 영어를 열심히 공부해야 되네. 이 나라에서는 소학교 일 학년 때부터 영어가 필수과로 되어 있고 중학교 이상 교과서는 한문만 제외하고는 전부 다 영문으로 된 교과서이기 때문에 중학교에서도 영어 실력 없이는 공부를 할 수가 없어.”
이렇게 타일르는 안 선생의 진지한 태도에 두 소년은 감동했다. 그들은 학업을 계속하기로 작정하고 그 사연을 편지로 써서 국제우편 편으로 집으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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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여인이 내미는 바늘을 받아든 애덕이는 뜸 한 개를 떠주었다. 세 걸음 못 가서 또 딴 허리띠에 한 뜸 떠주고 가야만 되었다. 다섯 번째 허리띠에 다섯 번째 뜸을 떠주고 있는 순간 그녀에게는 어떤 결심이 내려졌다.
그녀는 돌아섰다. 오던 길을 되돌아 걸었다.
부청 안으로 도로 들어갔다. 아무리 계집애라고 할지라도 여학교(중등학교) 졸업을 못하면 마땅한 데 시집보낼 수가 없게 된 세상인데, 더구나 어미는 전문학교 교육까지 받았는데 하는 생각이 난 애덕이는 창씨를 하고라도 딸 입학을 시켜야 되겠다 결심한 것이었다.
그러나 부청 문안 넓은 복도에 주춤 선 그녀는 망서리지 않을 수 없었다.
몇 달 전 일이었다. 남편이 “여보, 큰일났오. 대학에서 우리 몇 사람이 여태 창씨하지 않았다고 백안시당해왔었는데 오늘 아침 조회 때 급기야 사태는 크게 벌어졌어요. 창씨 안 한 교직원들은 고하 막론하고 승진은 절대로 가망 없을 것을 각오하라고 교장이 엄포했다우.” 하고 말한 적이 있었었다.
“빌어먹을 자식들!” 하고 그녀는 부지중 소리 질렀다. 분통이 터지는 것을 억누루지 못해 씩씩하고 있는 그녀는 二十여 년 전 처녀 시절을 갑자기 회상하고 있었다. 일본 놈 형사들에게 가진 고문을 다 받고 三년 동안 징역살이까지 했는데. 자기 혼자만의 희생과 고난은 치지도 안 한다 할지라도 수十만 명이 흘린 피! 모두가 다 헛된 것이었는가! 가까수로 진정을 회복한 그녀는“여보, 그놈들이 순전히 떠보는 것이 아닐까요? 협박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요? 매부까지가 창씨했다면 북평 가 있는 웅덕이가 얼마나 비통하겠어요!” 하고 말했었다.
“하긴 그렇기두 해. 꽁한 처남이 울화가 치밀어 주체 못 할 거야. 좀 더 하회를 보기로 하지요.”
그러나! 신망해왔던 은사가, “최후일각 최후일인까지 싸우고” 쓴 독립선언서 공약 집필자인, 그 선생까지가 “단군은 일본 신무천황의 친동생”이라는 망발을 하고 있는 이때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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