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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로와 까마귀 1

백로와 까마귀 1

이상원 | 가하 | 2012년 08월 20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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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2년 08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400쪽 | 428g | 128*188*30mm
ISBN13 9788966473212
ISBN10 8966473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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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사랑! 너 자꾸 이럴래? 진짜 엄마 속 터져 뒤로 넘어가는 꼴 보고 싶어 이래? 무슨 일인지 말을 해야 알지, 문 걸어 잠그고 울기만 하면 어쩌라고!”

엄마가 문을 두드리며 반은 협박, 반은 애걸을 하며 난리를 친다. 아빠가 돌아오실 시간이 됐으니 속이 타기도 하겠지. 지금의 내 모습을 아빠가 본다면 으레 그래왔듯 모든 죄를 엄마에게 뒤집어씌울 것이다. ‘우리 사랑이가 어떤 딸인데!’로 썰을 풀며 전후 사정도 듣지 않고 엄마에게 모든 불똥을 튀긴다는 것이다. 엄마는 억울하고 속이 쓰려도 아빠의 혈압을 우려해 가만히 듣고 있을 수밖에 없으리라.

그걸 생각하면 엄마한테 미안하고, 안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문을 열 것은 아니지만! 오늘은 내 인생에서 두 번째로 불행한 날이었으니까. 얼마나 절망적이고 막막한지, 우는 게 문제를 해결할 열쇠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눈물이 앞을 가린다.

나 이제 어떡하냐고!

어제까지만 해도 나는 높은 S대 합격률을 자랑하는 명원외고에 합격한 것이 너무 좋아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그래도 학교에는 말짱한 정신으로 갔다. 웃으며 축하해주시는 선생님들의 격려에서 그간의 쌔빠지는 고생을 보상받았고, 어설프나마 같이 합격한 애들과 주스로 축배를 들었을 때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가슴이 벅차올랐다. 엄마와 아빠는 또 어떻고! 친척들에게 죄다 전화를 돌려 딸의 합격을 자랑한 다음 숯불갈빗집에서 거한 축하 파티까지 열어주었다.

하지만 하루도 안 돼 난, 내가 명원외고에 갈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닫는다.

합격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불합격이었다, 이런 돼먹지 못할 이유 때문은 아니다. 그랬다면 차라리 덜 억울하고 슬플 것이다. 헉, 소리 날 정도의 좋은 성적은 아니지만 합격 티켓을 거머쥘 정도의 실력 정도는 나도 갖고 있다. 딸의 일이라면 물심양면으로 팔을 걷어붙이고 돕는 아빠와 엄마 덕에 주구장창 고액과외를 했기 때문이다. 그러고도 명원에 떨어진다면 돌로 태어났다는 것을 광고하고 다니는 것이나 마찬가지기에 나는 진짜 코피 흘리며 공부했다. 과목에 편식이 있긴 해도 내 외고 합격은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명원에 갈 수 없다. 가고 싶지 않아 가지 않는 게 아니라 가고 싶어도 못 간다.

백성하! 백사가 거길 합격했는데 미쳤어? 그냥 포기하고 일반고를 가지, 백사가 다니는 학교에 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흐윽…….”

누가 죽은 것도 아닌데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은 오열이 터져 나온다. 속이 상한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백성하, 대체 그 사이코가 왜 명원을 지원한 거냐고!

아무리 따져도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다. 입학 초부터 학년 톱을 한 번도 놓친 적이 없는, 백병원 원장의 아들 백성하는 그저 그런 외고가 아니라, 전국의 수재들만 쓸어놓았다는 과학고에 가서도 충분히 상위권을 유지할 만한 인재였다. 세원사립중학교에 몸담고 있는 영장류치고 이 사실을 의심하는 생물은 없다. 그리고 그건 내가 치욕스러운 중학 시절을 견뎌내는 버팀목이 되었다. 백성하를 만난 것은 인생 최대의 불운이었으나 1년만 버티면 영원히 안녕이라 믿었던 것. 백성하는 과학고로, 나는 명원외고로 가서 각자 잘 먹고 잘 산다는 게 내 시나리오였다.

그런데 모든 기대가 물거품처럼 사라진 것이다.

내 흐느낌이 통곡으로 변하자 엄마의 전투력이 업그레이드됐다.

“왜 또! 누가 학교에서 괴롭혔어? 어제 합격한 게 잘못됐대? 엄만 다 괜찮거든. 걱정할 거 없으니 문 열어.”

목소리는 다정다감해도 손은 당장 문을 부술 태세다. 더 이상 버티면 뒷감당이 쉽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저녁밥은 물론 아침밥도 못 얻어먹을지 모른다. 드러누운 엄마 때문에 내가 아침에 아빠 밥을 차려야 할지도 모른다.

나는 잠시 갈등했다. 궐기하듯 머리에 흰 띠 수건을 두르고 안방에 누워서 끙끙거리는 엄마, 그리고 백성하의 야비한 얼굴. 10초간 균형을 유지하던 저울의 추가 백성하로 기울어진다.
백성하, 상상에서도 이겨야 직성이 풀리는 놈. 그런 놈에게 상상 속에서도 대들지 못하고 베개가 눈물로 질척일 때까지 울기만 하는 나. 하지만 이렇게 울지도 못하면 정말 가슴이 터져 죽을지도 모른다.

“썅, 나 이제 어떡하냐구…….”

나는 주먹으로 침대 매트리스를 두드리며 발을 굴렀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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