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어슨은 플래허티와 상당히 다른 양식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었지만, 사실의 재현이 현재적 사실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유사한 생각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사실들을 나열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에서 현실의 재현만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기록, 과거에 재현된 사실의 기록도 의미 있는 자료로 사용한 것이다. 따라서 플래허티와 그리어슨에게 ‘사실의 재현성’이라는 개념은 과거와 현재라는 시점의 한계를 넘어 재현하고자 하는 내용이 사실이라면 과거 사실의 기록 또는 재연까지도 포괄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 pp. 46~47
리펜슈탈 감독은 작은 체구의 히틀러를 영상에 담을 때 세심하게 연출했다. 카메라를 밑에서 위쪽으로 잡는 로우앵글(low angle)을 많이 사용했는데, 이는 관객이 히틀러를 우러러보게 하는 효과를 갖게 되어 시각적으로 히틀러를 영웅화시킨다. …… 리펜슈탈은 200여 대의 카메라를 동원하여 대규모 군중 신(scene)을 촬영했으며, 약 40m(120피트) 정도까지 올라갈 수 있는 카메라용 엘리베이터를 설치하여, 제복을 입은 채 정확하게 대열을 맞추어 서 있는 엄청난 규모의 군인들을 높은 곳에서 익스트림 롱샷(extreme long-shot)으로 담아냈다. 이렇듯 히틀러의 요청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에는 히틀러를 독일의 영웅으로 부각시키기 위한 치밀한 계획과 의도가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 것과 같은 외양을 취하고 있지만, 현실에 대한 왜곡과 조작이 은밀히 숨겨져 있다.
--- pp. 55~56
‘객관적인 관찰’을 강조하는 다이렉트 시네마의 경우, ‘현재’ 카메라 앞에서 펼쳐지는 외적 진실을 포착하려고 한 것이다. 반면에 인터뷰 등을 통해 인위적인 상황을 유발해 사람들 내면에 숨겨진 내적 진실을 끄집어내려 하는 시네마 베리테의 경우, ‘현재’ 카메라 앞에서 사람들이 토로하는 그들의 내적 진실을 포착하고자 추구했던 것이다. 1960년대 다큐멘터리의 두 주류를 형성한 다이렉트 시네마와 시네마 베리테에서 ‘사실의 재현성’은 현재 카메라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실, 즉 현재 시점의 사실로 제한됨으로써 다큐멘터리의 영역을 매우 좁게 만들었다.
--- p. 88
성찰적 양식은 다큐멘터리가 실제 세계를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재현한다는 전통적인 다큐멘터리의 ‘사실의 재현’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다큐멘터리 이론가 빌 니콜스에 의하면, 성찰적인 다큐멘터리는 객관적 지식이나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회의론에 사상적 기초를 둔다. 절대적인 객관성이 불가능한 것이라면 오히려 제작자인 ‘나’의 관점임을 의도적으로 드러냄으로써 그 작품이 감독의 주관적 관점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분명히 하자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관객들이 그것을 토대로 스스로 진실을 구성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 p. 93
21세기에 접어들면서 다양한 다큐멘터리가 등장하는 가운데 주목해야 할 점은 다큐멘터리의 기본 토대라고 할 수 있는 ‘사실성’과 그 대척점에 있는 ‘허구성’이 모순적으로 결합한 형태의 다큐멘터리가 등장했다는 점이다. ‘사실의 재현’을 기본 토대로 하는 다큐멘터리에서 ‘허구’와 결합한 다큐멘터리가 등장한 것인데, 다큐멘터리가 ‘허구적 내용’과 결합한 것이 모큐멘터리이며, ‘허구적 표현 형식’과 결합한 것이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이다.
--- p. 181
시사 다큐멘터리는 언제든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다큐멘터리 장르가 사람들에게 부여하는 ‘진실 효과’ 때문이다. 하지만 시사 다큐멘터리에서 ‘사실의 재현’은 절대적으로 객관적인 재현이 아니라, 분명한 관점과 주장을 담은 재현임을 명백히 알 수 있다. 따라서 다큐멘터리에 부여된 ‘사실의 재현성’이라는 것은 다큐멘터리가 절대적인 객관성을 담보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다큐멘터리가 사실을 재현한다고 믿는 사람들의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 p. 205
1960년대 이후 등장한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에 의해 ‘과연 절대적인 객관성이 가능한가?’라는 근본적인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카메라가 투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환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차피 객관적인 진실을 담보할 수 없다면, 다큐멘터리에서 보여주는 ‘사실의 재현’이 감독에 의해 선택된 기록, 만들어진 기록이라는 점을 영상에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진실’을 드러내는 이상적인 방법이라고 보게 되었다.
--- p. 2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