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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9년 06월 11일
쪽수, 무게, 크기 520쪽 | 568g | 140*210*35mm
ISBN13 9791196561871
ISBN10 1196561877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나도 과거를 감각하는 사람이다. 내 감각은 당나라 때의 시, 한나라 때의 조각, 진나라 때의 전각 같은 데 머물러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제아무리 노력해봐도 내가 겪고 있는 이 시대는 언제나 낯설기만 하다. 덧붙이자면 아무래도 호감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컴퓨터, 비행기, 에어컨, 감마나이프,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에 이르기까지, 비록 과거에 비해 훨씬 풍요롭고 자유롭더라도, 내게 이 시대는 받아들일 수는 있을지언정 좋아할 수는 없는 시대다.
--- p.41

당신은 아마도 누군가의 가슴을 쓸어내리게 했던 그 하늘가의 먹구름을 기억할 것이다. 마치 먹물 한 대야를 뒤집어쓴 것 같은 하늘이지만 구름은 가장자리에 붉은 놀이 구불구불한 금테를 두르고 있었다. 먹구름은 두 겹, 세 겹, 강철 같은 은회색의 높은 구름과 짙은 먹물 같은 낮은 구름이 뚜렷하게 층을 이루며 한없이 드넓은 공간을 사이에 끼고 있었다. 길 잃은 산지니 한 마리가 날개를 퍼덕이고 있었다. 어디로 가야 이 어두운 밤의 포위망을 벗어날지, 어디로 가야 자신의 절망을 벗어날 수 있는지 모르는 양. 당신은 평생 그런 광경을 본 적이 없었다. 앞으로도 다시는 그런 광경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은 그때 온몸이 덜덜 떨리던 것을 기억한다. 그러나 그날 당신이 왜 외출을 했는지, 어디서 소나기 직전의 먹구름을 보았는지, 함께 길을 걷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그가 도대체 어떤 감상을 늘어놓았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 일을, 당신은 모두 잊었다.
p.113

나는 세상의 수많은 일이 결코 중복될 수 없으며, 특정한 그 순간 그 지점에서만 빛을 발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 기억 속의 어떤 맛난 음식은 몇 년 뒤 다시 먹게 되면 아무 맛도 나지 않을 수 있다. 우리 기억 속의 어떤 열렬한 키스는 몇 년 뒤 다시 재연하게 되면 이상하거나 심지어 소름 끼칠 수도 있다. 땅 위에 피어난 꽃송이처럼 때가 지난 뒤에 옮겨 심으면 시들고 말라비틀어질 수밖에 없다.
--- p.139

생활은 일종의 각성이다. 전 우주의 기나긴 밤으로부터 깨어나는 완벽한 기회인 것이다. 모든 사람이 이런 기회를 갖는다. 나는 벌써 몇 번이나 졸다가 거의 잠들 뻔했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깨어 있도록 각성하고 자극을 주어야만 한다. 충분히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질 수 있도록, 내가 기적을 만났을 때 꿈을 꾸고 있지는 않은지 제 볼을 꼬집어보는 것처럼 말이다.
--- p.180

나는 죽음이 두렵다. 사실은 삶 또한 두렵다. 마침내 삶이라는 것이 죽음보다 더 쉬운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틀림없이 수많은 핑계를 대며 그런 삶을, 새로운 시작들을 피해 달아나려 할 것이다. 아이에 대한 책임, 부모와 아내에 대한 의무, 그리고 친구에 대한 보상과 직장에서의 공적인 임무, 그리고 살아나가기 위해 필요한 돈……. 모든 것이 아주 타당한 이유가 될 것이다. 나는 심지어 떳떳하고 진지한 태도로 스스로를 설득할 수도 있다. 왜 낯선 위험을 스스로의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가? 왜 어떤 감각을 느끼기 위해 집과 친구를 떠나야 하는가? 그것은 외려 지나치게 이기적인 발상 아닌가?
--- p.183

중국인이 일본 침략자에게 항거하기 위해서만 ‘지구전’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 있는 일이 모두 원론적으로 ‘지구전’이다. 그런 일은 모두 시간의 축적을 승부수로 삼는다.
--- p.220

기억 속의 그곳은 영원히 거기에 남는다. 무엇으로도, 어떤 힘으로도 박탈할 수 없다. 기억은 한 사람이 마음속에서 홀로 누릴 수 있는 비밀 동굴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그 주인의 지문으로만 통과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은 통행의 권리와 즐거움을 나누어 가질 수 없다. 기억은 한 사람이 비밀 동굴 속에 감춰둔 황금과 같아서 그가 죽고 난 뒤에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게 된다.

--- p.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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