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 병풍을 둘러친 아늑한 산자락에 움막을 짓고 살아가는 병철, 흙으로 엉성하게 지어놓은 움집 아래로 삿갓배미 다랑이 논들이 마치 정원처럼 펼쳐진 운치 있는 곳이다. 결혼 적령기를 훌쩍 넘겨 어느덧 불혹을 향하고 있지만 아직 따뜻한 밥 한 그릇 해 줄 여자를 만나지 못한 채 삿갓배미 농사를 짓고 있는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우직한 농군이다.
머리에 쓰는 삿갓을 내려놓고 모를 심고 일어나면 그 삿갓 아래 겨우 모가 있을 정도로 작은 땅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에 걸맞은 두어 마지기의 땅 아닌가. 해마다 부족한 물에 시달리기 일쑤요, 가을이 되어 수확을 한다 해도 혼자 식량이나 때울까 싶은 적은 양에 불과했지만, 병철은 올해도 변함없이 봄을 맞아 삿갓배미에 모심기를 하기 위해 아침부터 부지런히 일을 해야 했다. 다랑이 논에 물을 잘 가두기 위해 논두렁도 살펴야 하고 모판도 튼튼하게 길러야 한해 농사를 잘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병철은 모심기를 위한 마지막 작업을 마치고 산으로 올라갔다. 푸짐한 나물거리가 온 산에 널려 있어 그것들을 채취해서 저녁 찬거리라도 준비해 보려는 생각에서였다. 이제 막 땅을 뚫고 올라오는 쑥을 캐고 향이 좋은 취나물을 뜯고 고사리를 꺾고 두릅을 따면 한 끼 반찬은 충분하다. 지천에 널려 있는 나물들은 먹을 만큼씩 따오면 되는 것이다.
산에서 갓 따온 나물들로 늦은 식사를 하는 저녁, 병철은 ‘왜 나는 움막집에서 몸서리치는 외로움을 겪어야 하는가. 왜 내 인생은 원활하게 풀리지 않는 길을 혼자서 걸어가야 할까?’ 자신을 위해서 따뜻한 밥 한 끼 차려줄 우렁각시는 언제쯤 나타날까. 그런 공상과 함께 못난 자신을 향해 푸념 아닌 푸념을 했다. 그렇다고 자신을 학대해서는 안 된다. 비록 허름한 집에서 살고 있지만 근심걱정 없이 농사일에 매진하고 산속생활을 즐기고 있으니까 행복하다고 느낄 때가 훨씬 더 많았기 때문이다. 뿌린 대로 거두는 정직한 땅, 매일 농사일을 반복하면서 산다는 것이 고행이 아니라 즐거움이다 여기면서.
산등성이에 봄기운이 찾아들기 무섭게 삿갓배미 논두렁을 지나 병철의 움막집 옆길을 지나치며 산에 오르는 사람들이 많다. 봄철에 새싹을 틔우는 자연산 나물을 캐고 뜯기 위한 사람들의 행렬이다. 대부분이 여자들로 비닐봉지를 챙겨들고 두서너 명이 어울려 산을 오르지만 가끔은 여자 혼자서 대담하게 산길을 오르내리는 경우도 있다. 울긋불긋한 옷을 입고 봄나물을 캐러오는 여인들을 보면서, 저 많은 여인 중에 혼자 살아가는 쓸쓸한 농부에게 따뜻한 밥 한 끼 해줄 우렁각시는 없을까 하고…….
병철이 움막집 마당에서 모판을 준비하고 있는데 젊은 여인이 혼자 산을 오르고 있었다. 등산복 차림으로 나물을 담기 위한 비닐봉투를 허리에 두르고 무엇인가 깊은 생각에 빠진 듯한 여인은 가끔 먼 산에 눈길을 주면서 산자락을 걸어간다. 저 여인은 왜 혼자 산에 오를까? 갓 서른을 넘겼을까. 조그마한 키, 알맞은 살집의 여인은 며칠째 움막집 옆을 지나 산에 오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산행을 하던 여인이 갑자기 병철에게 다가와 말을 걸어왔다.
“아저씨, 저 산 어디에 가면 두릅을 많이 딸 수 있어요?”
“왜, 두릅만 따고 다른 산나물을 뜯지 않나요?”
“아니요, 고사리도 꺾고 취나물도 뜯고 쑥도 캐고 닥치는 대로 채취하고 있어요.”
“두릅은 산길을 쭉 오르다가 왼쪽으로 돌아가면 평평한 곳이 나타나요. 그곳에 가면 많이 딸 수 있어요.”
“예, 고맙습니다.”
“아주머니, 산에 널려 있는 것이 나물이니까 많이 뜯어가세요.”
병철이 일러준 방향을 따라 여인은 다시 산속으로 들어갔다. 노총각 가슴속에 잠깐이지만 여인의 따뜻한 체취를 남긴 채 그렇게 사라진 것이다.
움막집에 혼자 살면서 때때로 거센 파도처럼 휘몰아오는 외로움, 고독함과 싸워야 했다. 그것은 자신이 결코 혼자서는 물리칠 수 없는 상대와 날밤 꼬박 새우며 치르는 지루한 싸움이 되기도 했다. 산나물을 캐러온 여인과 말을 주고받은 뒤부터인가. 지쳐 잠든 꿈속에 그 여인이 자주 나타났다. 방긋 미소 띤 얼굴로 병철 쪽에서 무엇인가 말을 하려는 순간 신기루처럼 사라지던 여인. 잠을 깼다가 다시 들면 또다시 나타나던 그녀.
이후 산나물을 캐러 산에 오르는 여인들을 흘끔흘끔 기웃대는 버릇이 생겼다. 다시 와서 말을 걸어오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하는 마음이……. 또다시 만난다면 용기를 내서 꼭 물어보리라. 왜 혼자서 산길을 오르내리면서 산나물을 캐고 다니느냐고. 무엇인가 서글픈 사연이 있을 것 같았다.
나흘째 되던 날, 드디어 홀로 움막집 곁을 지나가는 그녀를 만났다. 너무 반가웠다. 아니 꿈속에서 자주 만난 탓인가? 그에게 어느새 가까운 존재가 되어버린 여인, 그 여인이야말로 병철의 오랜 외로움을 달래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주머니, 오늘도 산나물 캐러 가시나요?”
“예, 몸이 아파서 며칠 못 왔어요. 오늘은 괜찮을 것 같아서 등산도 할 겸 왔습니다.”
“집은 허술하지만 들어와서 잠시 차 한 잔 하고 가실래요?”
“들어가도 될까요?”
‘아이구, 이리 고운 분을 마주하고 차를 할 수 있다면 외려 제가 영광이죠.’ 여인을 향해 금방이라도 터져 나오려는 말 아닌가. 행여 여인에게 들킬 세라 입속에 고이는 침을 얼른 삼켰다. 어찌 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는 순박함에 끌린 것일까. 여인도 경계를 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어쨌든 마음이 서로 잘 맞았던지 여인을 집안으로 들이는 데 성공한 그는 마음이 날아갈 듯이 기뻤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여자와 한 집에 같이 있어 보기는 처음인 것 같았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