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림의 고개가 기계처럼 뻣뻣하게 돌아갔다. 놀리려는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는 진지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거 상당히 거슬리는 일이야.”
나중에 떠올려봤을 때, 이 순간 정말 머리가 돌아버렸다는 생각을 할지도 몰랐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유림의 머릿속에서 뭔가 툭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확신할 수 있었다. 분명 이성 줄이었다. 워낙에 말보다 행동이,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 나가는 유림이다 보니 스스로 타이르기도 전에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한없이 부푼 마음은 그만 빵 터지고 말았다.
털썩!
유림이 그녀에게 몸을 기울고 있던 도현의 목을 두 팔로 휘감고 그대로 그를 뒤로 밀쳤다. 중심을 잃은 도현이 뒤로 넘어갔고 본의 아니게 그의 몸 위에 올라탄 자세가 된 유림은 자신이 지금 어떤 모습인지, 어떤 상황인지, 그리고 무엇보다 두 사람이 지금 얼마나 어정쩡한 관계인지 하는 생각은 하지 못한 채 그에게 입술을 포갰다.
‘부드러워.’
유림은 눈을 지그시 감고 입술 감촉을 만끽했다. 거의 대부분 딱딱한 말만 나오는 입인지라 혹시 그 입술도 거칠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 적도 있는데 마치 휘핑크림처럼 사르르 녹을 것만 같았다. 찬찬히 입술을 열며 숨결이 맞닿게 되었을 때, 유림의 심장은 제자리를 잃고 막 뛰쳐나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있는 도현을 보기 위해 슬쩍 눈을 떴다.
‘헉!’
놀란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모든 것을 꿰뚫을 것 같은 날카로운 눈동자가 이렇게나 가까이에서 그녀를 관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아무런 느낌도 없었던 것일까. 그 생각을 하자 유림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기분이었다.
‘당연히 그럴 리가 없지. 애인이 따로 있는 남자니까.’
그녀는 대책 없는 자신의 행동을 힐책하고 얼른 그에게서 몸을 떼었다.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의 마음이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나 선명한 붉은색이 감돌게 되었다. 홍당무처럼 빨개진 자신의 얼굴을 알아차린 유림은 더욱 당황했다. 여기에서는 좀 더 뻔뻔하게 나와야 덜 민망할 텐데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본능에 몸을 맡긴 자신을 거꾸로 매달아버리고 싶었다. 도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아마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어버린 건지도 몰랐다. 유림은 진심으로 울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자신을 벌주는 것은 차후의 문제였다. 그녀의 마음을 들켰을 것이다. 그 사실이 더 암담했다.
‘여자가 싫어서 그쪽 길로 간 건지도 모르잖아. 전에도 여자 몸은 싫다고 그랬고. 역시, 나 무슨 짓을 저지른 거니?’
그런데 그때 도현이 입술을 쓸고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본 유림은 가슴이 콩콩 뛰었다. 왜 이 타이밍에서 저렇게 섹시한 자태를 취하는 걸까. 민망해서 눈 둘 곳을 찾지 못하는 심정인데 되레 그를 뚫어지게 보게 되었다. 다시 눈이 마주치자 유림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가 탁자 위에 아이스크림 통을 발견했다. 머릿속이 잔뜩 엉켜 있던 터라 말하는 순간에도 황당한 변명을 늘어놓게 되었다.
“아무래도 아이스크림에 알코올 성분이 들어가 있는 것 같아요. 아닌가, 원래 내가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취하나? 어쨌든 대장님이 사 오신 아이스크림이 체내에 들어가서 뇌의 기능을 마비시킨 것 때문이에요. 요즘에는 아이스크림도 이렇게 독하게 나오나.”
“아이스크림에 취했다?”
도현의 표정으로 봐서 잘 속여 넘겼다고 할 수 없었다. 그가 이런 말에 속을 거라고 처음부터 기대하지도 않았다. 초등학생도 비웃을 변명거리였다. 유림은 또 멋대로 움직인 자신의 입을 이번에는 정말로 때려주고 싶었다. 가만히 있으면 정말 중간이라도 갈 텐데, 왜 항상 사고를 치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자신을 탓하던 유림은 빙긋 웃고 있는 도현과 눈이 마주쳤다. 다정함이 가슴에 저미도록 들어와 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말았다.
“아이스크림에, 그렇군.”
“자꾸 반복하지 마세요. 저도 그런 말도 안 되는…….”
유림은 도현이 놀리는 거라 생각해 항의를 하려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녀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손이 유림의 목을 잡아당긴 것이다. 방심하고 있던 차에 그녀는 단박에 그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막 그를 밀쳤을 때와 비슷한 자세이긴 했지만 그때와는 달리 유림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의 가슴에 곤두박질쳤다. 가슴이 작은 틈 하나 없이 밀착되자 유림의 얼굴이 다시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