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는 검소한 산속생활을 하며, 사람이 얼마나 단순하고 작게 가지고도 살 수 있는지를 배워간다. 무료함을 안는 법도 촌음을 쓰는 법도 배운다. --- p.32
다산가의 여인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속달속달 거리기 시작한다. 골골이 쑤석인다. 하인들도 귀를 종구고 속달속달 거리며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다. 수양버들이 봄바람에 나부낄 때 아녀자들은 곤고해서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고 그럴수록 아등아등 불평이 많아졌다. 어살버살 불평을 쏟아내면 굶주림을 잊기라도 할 듯이 쌓이는 불평이 한 과녁을 향하기 시작한다. --- p.75
그녀는 다시 강기슭을 달린다. 끝없이, 돌아오지 않을 듯이 달린다. 두릉의 바람, 어제와 다른 그녀를 버린 바람이다. 몸에 익은 듯 익지 않은 바람이다. 남쪽바람과 다른 친숙해질 수 없고 메마른, 들숨과 날숨을 막고 가슴놀이를 멈출 듯 부는 바람, 그의 젖내까지도 없애버린 냉혹한 바람이다. 그 바람이 그녀 귀에서 귀 설게 운다. 쉬익- 쉬이익-- 그녀의 모든 희망이 깨어져나간 김빠진 소리처럼 운다. 세상 끝의 바람처럼 흰 억새 숲에 파묻혀서 사라지고 싶다. --- p.111
-사부, 생각을 바꾸십시오. 사부께 불혹지년不惑之年에 천공이 또 다른 삶을 주셨다고, 한양에서 쫓겨난 게 아니라 새 누리를 찾아왔다고, 피투성이 당파싸움에서 스스로 도망쳤다고, 학문을 닦으며 손발이 되게 제자들을 가르치고 길러 저술로 즐거움을 찾았다고, 외진 바닷가 백성들과 어울려 살갑게 살고 새 가족과 새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애면글면도 즐겁다고, 그리 생각할 수 없을까요? 왜 해배와 출사를 바라고 곤고함을 사서 건강을 상하십니까? --- p.130
나 이제 슬픔을 안고
떠나가야 하는가!
지척에 있어도
천리만리 먼 곳에 있는 그를 두고
피땀과 함께한 그의 체취가 남아있는
초당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백포기 작약과 꿀벌을 친구삼아
잉잉거리는 벌떼에 추억을 물으며
아홉이랑 푸전가리 심고
어린 딸 달래가며
홀로 살아가야 하는가. --- p.170
찻잎을 덖는다. 수는 자신이 찻잎이 되어 덖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아! 내가 한 줌의 차가 되었구나’ 누군가 찻잔을 준비해놓고 뜨거운 물을 붓는다. 그 뜨거움에 잃었던 감각이 깨어난다.
그녀는 자신도 찻잎처럼 죽어야 한다고 깨닫는다. 자신을 철저히 버림으로써 짙은 향기로 남을 수 있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자신의 삶이 헛되지 않을 거라고, 그래야만 그를 향한 마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되뇌인다. --- p.215
-그렇단다! 너도 사랑을 특별하게 생각하지 말고 생활이 사랑이라고 생각해 보거라. 논어(12권 10장)에 사랑한다는 것은 사람을 살아가게끔 하는 것이다 라는 글도 그런 뜻을 포함하고 있지. 생활이 달라질 거야. --- p.228
-배고프면 꽃을 찾아 꿀을 먹고 거처할 집이나 방도 없이 오직 오늘을 위해 사는 나비처럼 살아가야 할까요? 벌들과 나비들의 삶, 어느 쪽이 옳다고 단정 지을 수 없다셨는데 그럼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제가 선택해야 할 업보는 어느 쪽 일까요. --- p.232
-울지 말거라! 네 아버님은 대단한 분이시다. 유배 와서 8년이었지! 초당 앞에 채마밭을 일구게 되자 채소를 길러서 어찌하신 줄 아니? 꽃다지와 가장 좋은 채소는 아랫마을 어른들에게 드리고, 중간치는 시장에 팔고, 가장 나쁜 것을 추려 드셨단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그런 마음씨 때문에 처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사람들이 아버님을 돕게 되고, 그 결과 많은 책을 쓰시게 되었단다. 매사에 철저하시고 끊임없이 노력하셨지! 너도 보았지? 내가 아버님을 따라했더니 아랫마을 분들이 많이 보살펴주셨잖아. 복은 그냥 오는 게 아니란다. 다 그렇게 돌아오는 거란다. --- p.282
일곱 살 때 벌써 ‘할아버지가 그리우면 아버님 얼굴을 보고, 시집 간 누이가 보고 싶으면 어머님 얼굴을 본다’고 시를 지었으니 천재 소리를 들었지요. --- p.289
홍에게 다산초당은 밀물과 썰물을 헤치고 나가는 배움터였고 내게는 몽매를 펼치던 외딴 섬이었소. 당신은 그 섬에 색색의 천을 둘렀지요. 지금은 무엇이오? --- p.298
해미가 나를 삼킨다.
그도, 초당도, 산다山茶도,
슬픔을 품은 바다도.
날더러 슬픔을 지우고 홀로 서라고, 누구든 혼자라고.
어떤 사람도 슬픔을 삼키는 나를 알지 못하고
사랑이 품은 슬픔을 알지 못하고
슬픔을 만드는 너를 알지 못하고
슬픔을 삼키는 바다를 알지 못한다고
그래서 어려서부터 해미를 좋아했다고.
삶이 무겁게 가슴을 짓누르면
슬픔을 지우는 해미 속을 무작정 거닐었던
그 해미가 나를 삼켜버린다.
누구든 혼자라고.
--- p.2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