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예술과 과학은 별개라고 생각한다. 탄성이 절로 나오는 칼라트라바의 여러 작품 중 오페라 하우스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그 지붕에서 반사되어 나오는 빛을 보고 있자면 마치 머릿속에 시원한 바람이 지나가는 느낌이다.
가우디, 수비라치, 소토 세 사람 모두 그들의 생애 중 40여 년을 [사그라다 파밀리아]에 매달렸다. 카탈루냐인을 넘어서 동양인, 더 나아가 세계인으로까지 확장된 건축물을 지어올리고 있다. 히포크라테스는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고 했지만, 시공(時空)을 떠나 한 대상에 함께 미칠 수 있고, 사유할 수 있는 면에서는‘인생도 길고, 예술도 길다’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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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한반도에서 벌어진 동족상잔의 비극은 어떤가. 비극의 역사는 현재 진행형이다. 아직도 6·25사변(事變), 6·25동란(動亂), 한국전쟁(Korea War)까지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며 용어 통일조차 안되었다. 학계에서는 내전이었느냐, 국제적 전쟁이었느냐 논의도 제대로 나지 않았다. 정치적·학문적 미완(未完)의 상태가 예술적 탐구에도 영향을 미치는 건지, 한반도의 슬픈 역사는 [게르니카]처럼 세계적 예술 무대에서 치열하게 조명 받은 적이 없어 보인다. 우리의 아픔이 우리만의 슬픔으로 기억되어 끝내 잊힐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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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골목, 꽃의 거리에서 좁은 골목 사이로 메스키타의 뾰족지붕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지나온 로마교와 이슬람 성곽은 사이좋은 남매처럼 친해 보인다.
좁은 골목을 이웃하고 있는 대문 앞 난간에 앉아 어린 딸을 껴안고 구걸하는 여인을 보았다. 내가 가장 가까이에서 본 집시였다. 회갈색의 눈동자에 마른 갈색의 피부, 화려한 색감의 옷차림, 아무렇게나 묶은 검은 머리카락이 내가 본 집시 모녀였다. 유대인 마을에서 본 집시 여인과 어린 딸은 그림과 같이 각인되어 꽃보다 더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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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람브라를 에메랄드 사이에 박힌 진주라고 하였던가. 그라나다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맹인이라고 한다. 천삼백 년 전 색감에서는 주변을 위압하지 않고 잔잔히 스며드는 멋을 느낄 수가 있다. 한국의 단청은 어떠한가. 위압감을 주는 강한 대비색을 썼는가, 그것이 오히려 생동감을 주는 것이 아닐까. 둘 다 이해가 간다. 은은하게 스며들어 주변을 받쳐주는 존재가 되어야 할 때가 있고, 주변과 대비되어 강조되어야 할 때가 있다. 두 가지 상황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조화와 강조를 넘나들며 현명하게 행동을 취해야 하는 것이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자세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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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는 소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에서 19세의 그를 묘사하고 있다. 투우를 볼 생각은 없지만 관심은 있기에 빈 투우장 안을 둘러보았다. 전시장에서 본 투우사의 신발은 발레리나 슈즈와 닮았다. 살포시 긴장하고 있는 두 발을 담은 신발과 바지의 금실 자수 장식이 돋보인다. 투우사들은 고야시대의 복장을 갖추고 투우를 한다. 투우는 소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소와 함께 호흡하는 무용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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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달루시아의 황톳빛 대지, 황량한 풍경,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평원은 그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자꾸 기대하게 만든다. 생텍쥐페리는 소설《어린왕자》에서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에 샘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렇게 황량해 보이는 안달루시아가 아름다운 것도 어딘가에 아름다운 문화를 숨기고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굴곡 없이 펼쳐지는 너른 땅은 마치 또 다른 바다를 보는 듯하다. 화려하지 않은 소박한 풍경이지만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진한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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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의 시선에는 사물의 다른 모습을 꿰뚫어보는 열정과 날카로움이 있었던 것이다. 유년시절 [프라도 미술관]을 문턱이 닳도록 찾아다녔던 그의 모습은 우연이 아니다.
개성과 자유가 넘치고 생명력이 약동하는 피카소의 그림은 바르셀로나에서 출발했다. 바르셀로나는 스페인에서 문화적으로 가장 자유로운 도시였고, 옛 아라곤 왕국의 한 범주였던 프랑스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이기도 하다.
바르셀로나의 [피카소 미술관]에서 그의 그림으로 미술교육을 받고 있는 어린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가슴속에 하나의 혁명이 노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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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렬한 영혼의 울림이라는 플라멩코 춤은 ‘뜨거운 피를 가진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이의 춤’이라고 한다. 플라멩코 가수의 탁음은 우리의 판소리처럼 애를 끊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들의 한(恨)과 고통을 폭발시킨다고 하는데, 마치 ‘땅 밑에서 끓어오르는 슬픔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모습’과 같다. 플라멩코 음악은 리듬이 다양하고 변화무쌍하여 악보도 없이 연주자가 편곡을 하는데, 춤추는 이도 순간적으로 음악에 몸을 맞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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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는 죽어서도 여전히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자냐, 침략자냐 논란은 물론이고 사망 후 유골 안치 장소 논란은 최근까지 이어졌다. 1506년 숨진 뒤 그의 유골은 [세비야 대성당]에 안치되었는데, 2000년대 초 이 유골이 가짜라는 의혹이 제기돼 세계가 떠들썩했다. 스페인 연구진이 후손의 DNA를 유해와 대조해 이곳 성당의 유해가 진짜라고 발표한 뒤에야 논란은 일단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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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라만차에서 중국과 일본의 개방의 흔적을 보면서 백여 년 전 우리의 쇄국정책에 대한 아쉬움이 스쳐 지나갔다.
돈키호테는 중부 라만차의 한 마을에서 출발하여 남부의 시에라 모레나(Sierra Morena) 산에서 고행한 뒤 동북부의 사라고사와 바르셀로나에 이른다. 나는 이제 라만차의 한 마을을 거쳤다. 그리고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다음 여정에 대한 도전도 이어가리라 마음속으로 다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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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고향은 안달루시아 지방이었고, ‘보니따(Bonita)’라는 단어를 입에 자주 올렸다. 나중에 사전을 뒤져보니 경쾌한 발음만큼이나 근사한 뜻이다. ‘귀여운, 예쁜, 고운.’
‘감탄사가 나오는 달콤함’하면 지금도 수도교와 슈가 파우더가 떠오르고 ‘가무잡잡한 예쁜 아가씨’하면 안달루시아와 보니따가 생각난다. 안달루시아 아가씨가 말한 ‘보니따’가 가리키는 기분 좋은 느낌은 두고두고 즐기고 싶다. 수도교 근처 레스토랑에서 만난 아가씨 외에도 여행하면서 만난 기억하고 싶은 사람들을 이야기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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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계곡의 가장자리에 베네딕도회의 [산타마리아 데 몬세라트 수도원]이 있다. 대성당 바실리카(Basilica)로 들어가 ‘라모레네타(La Moreneta)’라고 불리우는 오래된 검은 성모상을 친견하였다. 성모마리아가 들고 있는 둥근 공을 만지며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줄이 꽤나 길다.
힘든 일이 있을 때 간절함으로 찾는 곳이 어디 깊은 산뿐이겠는가? ‘제가 힘듭니다’라며 토해내고 위안과 마음의 치유를 얻고자 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여행자의 모습으로 잠시 서 있을 뿐이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