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가 되었어도 신체 리듬은 여전히 직장인의 스케줄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에 신이는 평소의 출근시간 즈음해서 자동으로 눈이 떠지고 말았다. 그녀는 멀뚱하니 천장을 바라본 채로 오 분 정도 침대에 그대로 누워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 오 분 동안 신이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미쳤어, 미쳤어! 내가 어쩌자고 이런 짓을 벌인 건데! 멀쩡한 집 놔두고 왜 이사는 해서 이 생고생이냐고! 잠수 좋아하네. 이러다간 잠수하기도 전에 청소에 치어서 잠수병 먼저 걸리겠다!”
한숨을 내쉬며 그녀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한심스럽기 그지없는 오피스텔 안의 정경을 둘러보았다. 이 망할 놈의 이삿짐 정리는 벌써 삼일 째에 접어들고 있건만 왜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질 않는 건지!
게다가 아직도 집 구조에 적응을 하지 못한 기억력은 방금 전 자신이 둔 물건까지도 깜박깜박 하기 일쑤였고 지금 그 대표적인 물건이 머리끈이었다. 분명 어제저녁 잠들기 전에 어딘가에 풀어 둔 것은 확실한데 그 ‘어딘가’ 가 어디인지 당최 떠오르질 않았던 것이다.
몇 분을 뒤진 끝에 풀다 만 이삿짐들 사이에서 집게 핀 하나를 간신히 찾아내긴 했지만 그 핀으로는 파마조차 잘 먹지 않을 정도로 스트레이트 직모에 가뜩이나 숱까지 남들 배 정도인 그녀의 머리카락을 단단히 고정시키기에는 어림도 없었다.
결국 그녀는 하루 종일을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머리카락과 싸움을 해 가며 청소를 해야만 했다.
버릴 만한 것들은 거의 다 버리고 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구석에서 이렇게 쓸데없는 물건들이 많이 쏟아져 나오는 것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불과 몇 시간 만에 20L 종량제 봉투 두 개를 거의 다 채워가고 있는 쓰레기도 쓰레기거니와, 옷들도 처리해야 할 것들이 만만찮았다. 아직은 입을만한 것 같아서 아까운 마음에 챙겨왔지만 정작 새 집에 풀어놓고 보니 곧장 의류 수거함으로 직행해야 할 것들이 수두룩했던 것이다.
그렇게 하나 둘, 한쪽에 던져놓기 시작한 옷가지는 오후 무렵이 되자 어느 틈에 만만찮은 높이로 쌓여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신이의 등 뒤로도 진득한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빵빵한 에어컨조차도 많은 도움은 되지 못했다.
한참을 그렇게 정리에 몰두해 있던 신이는 원피스 하나를 발견했다.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것을 집어 들었다. 원피스와 함께 해묵은 기억 하나가 같이 딸려 올라왔다.
몇 해 전 딱 요맘때 즈음의 날씨에 모처럼 쇼핑을 했었더랬다. 그리고 그 날의 기분 상 순수하고 동화적인 느낌을 갖고 싶다는 충동으로 고른 것이 바로 이 순백의 하얀 레이스 원피스였다.
그러나 구입한 옷을 그 자리에서 갈아입고 매장을 나선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그녀는 엄청난 좌절감을 맛봐야만 했다. ‘도를 아십니까.’라며 앞을 막아선 한 쌍의 남녀 덕분에.
그때 그들이 했던 말을 떠올리면 신이는 여전히 이마에 불끈 힘줄이 돋곤 했다.
“지금 출근하시는 길인가 봐요? 이렇게 팍팍한 일 하실 관상이 아니신데 이게 다 조상님의 덕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저녁 여덟시가 다 된 시간이었으니 절대 평범한 회사원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건 확실했다. 그럼 도대체 어디로 출근하는 거라고 상상한 것일까. 팍팍한 일이란 건 또 어떤 일 이길래!
그길로 곧장 집에 돌아온 그녀는 그 후 몇 년간 단 한 번도 이 옷을 꺼내보지 않았던 것이다.
“나같이 생긴 얼굴로는 어떻게 해도 순수하다 라던가 청순하다란 소린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각인시켜준 뼈아픈 사건이었지. 아마.”
씁쓸하게 중얼거리며 신이는 원피스를 한쪽으로 던지……, 려다가 멈칫 했다.
막상 버리려고 생각하니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당시에도 꽤나 비싸게 주고 산 옷이었고 딱 한번, 그것도 집에 오는 그 잠깐 동안을 입었을 뿐이니 새 옷이나 마찬가지였다.
“밖에 입고 나가기엔 유행도 지났고, 기분 상으로도 그렇고……. 그냥 집에서 홈드레스 마냥 입을까?”
충동적으로 입고 있던 트레이닝을 벗어버리고 원피스로 갈아입은 신이는 신발장 앞의 전신 거울로 가서 자신의 모습을 이리저리 비춰보았다. 그 사이에 혹시 안 보이는 곳에 군살이라도 붙었을까 싶었지만 원피스는 그 때와 마찬가지로 무리 없이 근사하게 몸에 맞아 주었다.
“진짜 그냥 내놓기 아깝긴 하다.”
그때 그녀의 작은 움직임에 슬쩍 스친 쓰레기와 재활용 더미가 느닷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급박하게 몸을 날려 간신히 대참사를 막아낸 신이는 현관 입구가 온통 치워야 할 것들로 넘쳐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예 밖으로 나갈 수도 없을 정도로 점령당하기 전에 일부라도 치워야 청소를 계속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 손에 잡히는 대로 쓰레기와 재활용품을 집어 든 그녀는 낑낑거리며 더스트 박스를 향해 나섰다.
그리고 그 순간, 예고도 없이 1002호의 문이 벌컥 열렸다.
아 씨. 이 남자, 타이밍 하나는 기가 막히네. 어떻게 이 순간에 나오냐고! 최대한 마주칠 일 없었으면 하고 바랐는데 하필 이런 최악의 타이밍이라니!
당황한 신이는 구시렁거리며 최대의 속도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또 다시 멈춰 서서 인사를 나눈다던가 하는 상황은 절대 사양이었다.
번개같이 재활용품을 내려놓은 그녀는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전력 질주해서 집 안으로 뛰어 들었다.
헉헉거리며 숨을 고르던 그녀는 전신 거울에 자신의 모습이 비치자 헉 하고 숨을 들이쉬고 말았다. 그새 또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때 아닌 전력 질주 탓에 멋대로 흩어져 어깨와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새하얀 원피스까지.
영락없이 전설의 고향이네.
휘둥그레졌던 눈이 천천히 제 크기를 찾으면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신이는 이마를 구겼다.
“설마……, 봤을까? 아니야. 빨리 뛰었으니까 제대로 못……, 봤겠지?”
박스를 재활용품 함에 내려놓고 돌아올 때 까지도 은혁은 좀 전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였다. 자신이 본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이번에는 청력이 아니라 시력 검사를 하러 가봐야 할 판이었다.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눈에 띈 것은 좀 전에 자신이 내려놓은 택배박스였다. 여전히 살짝 멍 해있던 은혁은 아무 생각 없이 상자를 풀어 안에 들어있는 와인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비로소 정신이 좀 제자리를 찾아와 주는 듯 했다.
임은혁이 술을 별로 즐기지 않음은 여자에 관심이 없다는 소문만큼이나 유명한 것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은혁은 이런 센스 전무한 선물이 어떤 사람의 안목인지 오히려 궁금해지고 말았다.
박스의 발신자를 확인해보려 했지만 실수인지 고의인지 발신자 란은 비어 있었고, 덕분에 그의 눈은 자연스럽게 수신자 란으로 향했다.
수신자 주소는 정확하게 1002호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수신자 란에는 임은혁이라는 이름 대신 한 줄의 문장이 써 있을 뿐이었다. 그 문장을 다 읽고 나서야 은혁은 아까의 택배 기사가 짓고 있던 기묘한 표정을 이해 할 수 있었다.
[새로 이사 온 화성인, 아니 구신이 사는 집으로.]
자신에게 이런 희한한 택배를 보낼 사람이 없다는 사실은 차치하더라도 ‘화성인’이라는 단어에서 벌써 1001호 여자의 얼굴이 떠오르고 말았다.
확인해 보고 말 것도 없이 이 와인의 주인은 그 여자임이 틀림없으리라. 보낸 이가 어쩌다 주소를 헷갈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처음 공인중개사 사무실 앞에서 스쳤을 때, 설마 이웃사촌이 되리라곤 짐작도 못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나 깊은 인상을 남긴 여자였다. 기획사 대표인 임은혁조차 근사하다고 인정하게 만든 완벽한 외모도 한 몫 했지만 사실 그보다는 엉뚱했던 대답이 더 오래 기억에 남았었다.
은혁은 지금까지 그것이 비록 초콜릿 한 조각일 뿐이라 해도 자기 것을 잃고서 그렇게 환한 표정을 짓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어제의 행동 역시도 평범과는 한참 거리가 있었다. 엄청난 음식거리를 양 손에 들고서 대장균 십만 여 마리랑, 비피더스균 천 마리 등등과 함께 먹을 거라고 당당하게 말하던 여자의 얼굴이 떠오르자 은혁은 슬며시 웃음 짓고 말았다.
그리고 이내 그 웃음은 폭소로 바뀌었다.
‘구신이 사는 집’ 이라니! 자신이 조금 전까지 열심히 부정하려던 것을 너무나도 정확하게 표현해놓은 단어 아닌가!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