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동당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사회양극화가 심화되고 노동자가 심한 고용 불안을 느끼는 경제사회적 여건에서 민주노총 조합원의 대거 참여를 기초로 2000년 창당될 수 있었다. ……당내 정파는 당을 독점적으로 지배하지 않고 서로 협력했고, 이견도 당내 회의체를 통해 조정해나갔다. 결국 2004년 총선에서 10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총선 이후 민주노동당의 주도권을 장악한 자주파는 자신의 좌파 민족주의 노선을 민주노동당에 강요해 당을 위기로 몰아나갔다. 민주 개혁과 북한과의 공조 등을 중시한 반면 민중생활과 직결되는 비정규직 철폐와 차별 축소, 부유세 도입, 1가구 1주택 소유 제한 부동산정책 등의 입법과 대중 투쟁에서 야당과 차별화되는 실천은 보여주지 못했다. 그리고 자주파는 당내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패권주의적 행태를 자행했다.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에 대한 사회적 비판을 극복하려는 실천을 하지 못한 채 지지율이 급락했고, 2006년 지방선거와 2007년 대통령선거에서 참패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자주파의 친북적 경향과 패권주의는 평등파의 극심한 반발을 불러왔고 결국 2008년 분당에 이르렀다. --- p.39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관철되는 정치적 과정과 경제적 과정의 분리가 보여주듯이, 한국 사회에서 대중은 자유롭고 평등한 선거권의 행사를 통해서만 자신의 민주적 권리를 향유할 뿐 경제적 과정에서는 여전히 배제와 동원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따라서 기나긴 민주화의 과정을 지나왔음에도 한국 사회는 여전히 박정희 발전 모델이 구축해놓은 대중에 대한 경제적 동원 기제를 본질적으로 극복하지 못했으며, 그것은 오히려 그 형태와 내용을 달리한 채 재생산되면서 유효하게 작동하는지도 모른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198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민주화 과정은 궁극적으로는 민주주의의 실질적 내용성을 획득하지 못한 ‘의사민주주의(pseudo-democracy)’로 귀결되었다. 따라서 이명박 정부 등장 이후 최근 나타난 한국 사회의 정치적·사회적 퇴행성은 지난 시기 한국 사회가 성취한 민주적 성과에 대한 반동이 아니라 오히려 한국 민주주의가 갖는 ‘의사적’ 성격으로 초래될 수밖에 없었던 하나의 정치적 결과물이라 해야 할 것이다. --- p. 46
다시 말해서 비정규직 노동자는 유동적 과잉인구처럼 완전히 실업 상태에 놓인 것도 아니고 정체적 과잉인구의 최하층부처럼 구호 빈민의 지위로 전락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해고 위협 속에서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최대한도의 노동시간과 최소한도의 임금을 받아들이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는 유동적 과잉인구로 떨어지거나 구호 빈민으로 전락할 수 있는 불완전고용 형태의 상황에서 외줄타기를 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 p.77
한미 FTA 협상 개시 후 영화인의 투쟁이 농민과 노동자로 확대되고, 한미 FTA가 사회경제 전 분야에서 파괴적인 영향력을 미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회 각 부문별 이해당사자가 대책기구를 꾸리기 시작했다. 3월 7일 한미 FTA 저지 교수·학술단체 공동대책위원회 결성을 시작으로, 3월 8일 시청각미디어 분야, 3월 9일 농축수산업 분야와 문화예술 분야, 3월 22일 전국 대학생 단체, 3월 24일 보건의료 분야, 3월 27일 교육 부문에서 공동대책위원회가 속속 결성되었다. 3월 28일에는 이러한 부문별 대책위원회가 모여 ‘범국본’을 정식으로 발족하고 활동에 들어갔다. 범국본은 출범과 동시에 전국 지역 순회 문화제를 개최해 지역 운동본부 구성 사업을 추진했다. 실제로 지역 순회 문화제를 통해 지역의 운동단체가 문제의 심각성을 공동으로 인식하고 지역 운동본부 건설 사업에 나섰다. --- p.122
민주노조운동의 국제연대가 활성화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 전노협과 전국업종노동조합회의(업종회의)가 결성되고 난 이후부터다. 전노협과 업종회의가 결성되기 이전, 억압적 노사관계법으로 말미암아 민주노조운동의 조직이 불안정했고 또한 국제연대 사업의 자원과 역량이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전노협과 업종회의는 조직을 결성하고 난 이후부터 국내의 억압적 노사관계를 극복하려는 주요한 투쟁전술 중 하나로 국제연대 사업을 채택했다. 노동조합의 간부가 대외적으로는 국제노동기구(International Labour Organization: ILO) 총회 및 각종 국제노동기구의 회의에 참석해 한국의 억압적 노사관계를 폭로했고, 대내적으로는 ILO의 노동기준을 비준하기 위한 전국적 투쟁을 전개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노협과 업종회의는 국제노동조합연맹에 가입하지 않은 상태에서 국제연대 사업을 전개했기 때문에 국제연대 사업의 목표를 쉽게 달성하지 못했다. --- p.146
기후정의 활동가는 국제 지배체제가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를 하며 이 지형에 뛰어들었다. 2020년까지 50%의 온실가스 감축, 2050년까지 90% 감축, 급격하게 증가하는 ‘기후부채’ 청산(2010년 파키스탄의 피해만 500억 달러), 지배자가 선호하는 탄소시장 해체, 재생 에너지, 대중교통 및 다른 환경 친화적 인프라에 대한 대규모 투자 등이 그것이다.
그 결과 기후정의운동의 다음 단계는 당연히 어리석고 실현 불가능한 국제개혁의제[유엔기후변화협약(United Nations Framework Convention on Climate Change: UNFCCC) 대표단에게 지구를 구해달라고 공손하게 요청하는 것]가 아니라 기후정의운동이 지역 사회에 깊이 뿌리 내린 나이지리아와 에콰도르 유전, 오스트레일리아의 주요 석탄 항구, 영국의 석탄 화력발전소와 주요 공항, 캐나다의 모래 석유 지역, 미국의 탄광과 기업 본사 등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지역 행동에서 영감을 받은 직접 투쟁이다.
--- pp.168-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