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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마의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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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2년 08월 31일
쪽수, 무게, 크기 168쪽 | 252g | 125*204*20mm
ISBN13 9788927803645
ISBN10 8927803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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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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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옷 벗어요
그다음도 벗어요

가고 가고
가는 것들 아름다워서

주고 주고
주는 것들 풍요로워서

돌이킬 수 없어 아득함으로
돌아갈 수 없어 무한함으로

부르르 전율하며
흐르는 강물

나 옷 벗어요
그다음도 벗어요 -「물시」 전문

창밖 감나무에게 변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풋열매가 붉고 물렁한 살덩이가 되더니
오늘은 야생조의 부리에 송두리째 내주고 있다
아낌없이 흔들리고 아낌없이 내던진다

그런데 나는 너무 무리한 약속을 하고 온 것 같다
그때 사랑에 빠져
절대 변하지 않겠다는 미친 약속을 해버렸다

감나무는 나의 시계
감나무는 제자리에서
시시각각 춤추며 시시각각 폐허에 이른다

어차피 완성이란 살아 있는 시계의 자서전이 아니다
감나무에게 변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미친 약속」 전문

나를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은
나뿐인가
그래서 고독은 이리 깊은가

성난 발톱으로 달려드는 절벽 아래
밤바다를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은
바다뿐인가

내 안에서 일어서고
내 안에서 무너지는
천둥의 깊이

해골과 남루와 유랑의 불빛 출렁이는
밤바다를 생포하면 알 수 있을까

지옥보다 외로운
내 안의 내가 보일까 -「짐승 바다」 부분

살아 있다는 것은
파도처럼 끝없이 몸을 뒤집는 것이다
내가 나를 사랑하기 위해 몸을 뒤집을 때마다
악기처럼 리듬이 태어나는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암각화를 새기는 것이다
그것이 대단한 창조인 양 눈이 머는 것이다
바람에 온몸을 부딪치며
쉬지 않고 바위에게 흰 손을 내미는 것이다
할랑이는 지느러미가 되는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순간마다 착각의 비늘이 돋는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전문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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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은 틀림없이 물의 시집이다. 물에 대한 시집이기 때문이 아니라 음성으로 육화된 물이 차고 넘치는 물의 집이기 때문이다. 물길이 덧없는 인생 속에서 미의 극치를 보여준다고 간파한 이는 샤를 보들레르였다. 문정희 시인은 물을 통해 미의 극치를 표상하지 않고 즉자적으로 물로서 발화함으로써 미의 극치를 실연한다. 정화와 생명의 이미지로 표상되는 대신 물의 언어들은 여기서 스스로 극치의 고독과 처절한 비감으로 들끓다가 마침내 어떤 변명도 필요 없고 긍지도 소용없는 홀연한 즉자의 세계를 열고 있다. 그것이 사랑이랴. 물의 가르침을 이해하려면 그 물을 마시라는 선종의 지혜보다 즉각적인 물의 몸 하나가 지금 우리 앞에 당도했다.
조강석(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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