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한동안 마주친 눈빛이 허공에서 맞물려 떨어지지 않았다. 잔잔하던 그의 눈동자가 작은 파란을 일으켰고, 눈빛의 떨림이 잦아들자 그의 목소리가 그녀의 귀를 깨웠다.
“유리애.”
“응.”
그의 목소리에 방금까지 멍해 있던 리애의 눈동자가 태연한 감정을 되찾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닫혀있던 그의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우리…… 진짜 애인할까?”
리애는 다소 놀란 눈을 끔뻑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무거운 정적이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의 여백을 갈라놓았다. 그를 빤히 쳐다보던 리애는 한동안의 침묵 끝에 실없는 웃음을 픽 터트렸다.
“너무 성의 없다. 프러포즈에도 어느 정도 은유가 필요한 거 아니야?”
“은유.”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멋대가리 없는 프러포즈라고 생각했던지, 유화의 뺨이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그런 그를 흘겨보던 리애가 한숨을 내쉬며 웃었다.
“에휴- 여기 또 환자 하나 늘었네. 나한테 반했지?”
너무나 직설적인 그녀의 물음에 발갛던 유화의 얼굴이 금세 당혹감을 나타냈다.
“한눈에 반해야 애인이 되는 건가?”
“여잔 늙어 죽을 때까지 여자라고. 프러포즈든 사랑이든 낭만적인 걸 꿈꾼다는 거 몰라?”
“그럼 지금 당장 장미꽃이라도 사 올까?”
낭만이라는 리애의 말에, 유화는 정말 그래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 듯, 꽤나 진지해진 표정이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그녀가 작게 쿡쿡거렸다.
“장미꽃이라면 아주 치가 떨리도록 질리거든.”
“흐음……. 억울한데.”
“뭐가?”
“낭만적이지 못해서 퇴짜 맞게 생겼으니까.”
“하하하!”
딴에는 진지한 표정이라, 농담인지 진담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리애는 그의 말이 재미있다는 듯 크게 웃었다. 한참을 웃던 그녀는 겨우 웃음을 추스르고 그를 돌아보았다.
“우리 나이가 열정보다는 현실에 맞게 사람을 사귈 나이지. 하지만…….”
“하지만.”
“현실에 맞춰 봐도 유화 씨와 나는 어울리지 않아. 백설아 씨가 하는 말 허투로 들었어? 난 신데렐라가 아니라고.”
그녀의 말에 유화는 픽,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모호한 표정을 가리려는 웃음이었지만 그의 미소 속에는 진한 고독이 스며 있었다.
“내가 네게 자격이 안 된다는 말처럼 들린다. 아니, 내가 네게 모자란 사람처럼 느껴져.”
“하하, 그럴 리가…….”
또 다시 침묵이 흘렀다.
째깍째깍, 전시실 한쪽 벽에 걸린 시계에서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초침소리와 스탠드에서 뿜어져 나온 은은한 오렌지 빛이 함께 호흡하며 그들의 정적을 감쌌다. 침묵이 주는 어색함이 무거운 듯 리애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모자란 건 나야. 이놈의 성깔머리가 열등감이 심해서 그런지, 나보다 잘난 남자를 사귈 수는 없나 봐.”
“유리애…….”
억지로 태연한 표정을 짓던 리애는 양팔로 감싸 안은 무릎을 스르르 풀고 유화를 쳐다보았다. 그녀와 시선을 똑바로 맞춘 유화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런 핑계는 대지 마. 적어도 넌……내가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높은 벽이니까.”
“벽.”
“그래, 벽……. 그래서 네가 좋다.”
심각하게 표정을 굳히던 리애가 제 가슴을 손으로 쓱쓱 문지르며 투덜거렸다.
“음음, 좀 작긴 하지만 벽이란 소리는 들어본 적 없는데.”
그의 입가에 멋쩍은 미소가 하얗게 매달렸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리애에게 느낀 유화의 감정은 그녀가 좋다, 라는 것이었다. 성추행 범을 당당히 고발한 용기도 멋있어 보였고, 법률사무소에서 날카롭게 따귀를 날리던 대담함도, 승패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인생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도, 그리고……딸이라는 이유로 맘대로 지었다는 그녀의 이름도 좋았다. 현실에 최선을 다하는 솔직함과 굳은 의지를 지닌 유리애라는 여자. 집착을 사랑이라 착각한 채 자신의 꿈을 접은 그와는 다른, 의지와 집념이 높디높은 벽. 유화는 자신이 가지지 못한 그 무엇을 품은 그녀가 무작정 좋아지기 시작했다.
멍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리애에게 다정하게 시선을 맞춘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한 말이지, 사랑은 DIY…… 열정만 필요한 게 아니라, 인내와 이해와 한결같은 애정도 필요한 거라고. 서로에게 맞춰가며 자신을 변화시키는 거라고, 그 사랑이 예뻐질 때까지 끊임없이 다듬어 가는 거라고.”
“그랬지.”
리애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긍정하자 유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뭘 그러자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는 리애를 잔잔한 눈으로 바라보던 유화가 작게 속삭였다.
“네 말처럼, 서로에게 맞춰가는 사람이 되자고. 너라면……내 가슴을 맞춰갈 수 있을 것 같다.”
조금 전과 똑같은 기류의 침묵이 그녀를 덮쳤다.
리애의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하던 유화는 빨갛게 상기된 그녀의 뺨 위에 조심스레 손을 올렸다. 달아오른 뺨 위를 세심한 그의 손길로 쓰다듬던 그가 다시 말했다.
“내가 네게 맞춰갈 수 있는 남자였으면 해.”
당혹스런 표정으로 무언가를 말하려던 리애의 입술이 꾹 다물어지고 말았다. 그녀에게 시선을 맞춘 유화의 얼굴이 천천히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따스한 입김이 코끝에 닿음과 동시에, 나란히 포개어진 그의 입술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그녀의 입술을 열고 들어와 쉬이 나을 것 같지 않은 열감처럼 온몸에 퍼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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