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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의 길 : 임시정부의 중국 노정을 밟다 (상)

백범의 길 : 임시정부의 중국 노정을 밟다 (상)

[ 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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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문화 교양서 top100 2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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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9년 06월 26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364쪽 | 696g | 153*220*25mm
ISBN13 9788950975814
ISBN10 8950975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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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6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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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김구는 국내의 가족들을 상하이로 불러들였다. 김구로서는 상하이 생활이 그렇게 길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독립운동이 장기전이 될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1920년 1월 임시정부가 독립전쟁을 선포하고 이핀샹에서 신년축하회를 할 때만 해도 다음 해의 신년축하회는 서울에서 열자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낙관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그러나 1921년 기대를 걸었던 워싱턴회의에서 한국 문제가 상정되지 않으면서 독립운동 진영의 열기는 빠르게 식어 갔다. 김구도 이 점을 절실히 느꼈을 것이다. 결국 장기적인 독립운동을 위해서는 생활이 안정될 필요가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가족이 곁에 있어야 했다.
---「상하이(1)-마랑로 임시정부청사」중에서

상하이에 머무는 동안 김구는 무엇보다도 안중근의 아들로서 변절한 안준생을 체포하여 처벌하고자 하였다. 민족의 영웅 안중근의 명예를 더럽힌 안준생의 행위는 결코 용서될 수 없었다. 안준생은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도 상하이에 잔류하였다. 1939년 10월 상하이 한인들의 ‘만선시찰단’ 일원으로 서울에 들어가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박문사를 방문하였다. 그 자리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 이토 분키치를 만나 아버지 안중근의 ‘죄’를 사죄함으로써 국내외 언론에 대서특필된 바 있었다. 그때 중국 대륙을 전전하다 막 충칭에 도착한 김구도 조선총독부에 의해 연출된 안준생과 이토 히로부미 아들의 ‘화해극’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안중근의 정신을 기리고 그 유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김구는 그 누구보다도 충격을 받았다.
---「상하이(1)-카이쯔얼로 경무국」중에서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 훙커우공원 의거에 대해서도 일본총영사관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의거 당일 상하이총영사는 육군·해군 등과 협의하여 “이 기회를 이용하여 한국 독립운동가에 대한 일제 검거를 프랑스 측에 요구”하기로 하였고, 밤 8~9시경에 일본 헌병 사복대 등 수백 명은 한인이 다수 거주하는 지역을 철통같이 포위하고 한인의 출입을 경계하였다. 다음 날인 30일 오전 4시 영사관의 아카키 사무관 지휘하에 70명에 이르는 검거반을 출동시켜, 오전 5시 프랑스 공무국 경찰대와 현지에서 회동하여 한국인들을 검거하게 하였다. 이후 프랑스 조계의 한인 사회는 ‘백색테러’가 횡행하는 암흑천지로 변하였고, 결국 안창호를 비롯한 한인1 1명이 체포되었다.
일제는 물론 김구를 체포하려고 하였다. 5월 2일 상하이총영사가 외무대신에게 올린 보고에 의하면, 헌병대장과 협의하여 “경찰 20명, 헌병 10명, 총 30명의 체포대”를 조직하여 김구 체포 작전을 개시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김구 체포를 위해 헌병대 100명을 대기시켰고 박춘산이라는 첩자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상하이 일본총영사관은 윤봉길 의거 이후 김구 체포에 일화 20만 원의 현상금을 걸었고, 다시 일본외무성과 조선총독부·상하이주둔군사령부 등과 합동으로 60만 원의 현상금을 걸었다.
---「상하이(2)-황푸 강변, 일본총영사관, 애스터호텔, 부두」중에서

1920년대 후반 임시정부는 무정부 상태나 마찬가지로 위축되었다. 1926년 12월 김구가 임시정부의 수반인 국무령이 되었고, 이후 그는 임시정부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골몰하면서 열혈 청년에 의한 의열 투쟁을 모색하게 되는데,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자금이 필요했다. 이에 김구가 채택한 것은 해외 동포들에게 편지로 후원을 요청하는 이른바 ‘편지정책’이었다. 그 결과로 미주·하와이·멕시코·쿠바의 동포들이 보내 주는 후원금이 답지하였는데, 김구가 얼마나 감격했는지 『백범일지』에는 후원자 30여 명의 실명이 일일이 기록되어 있다. 그 자금은 대부분 우편환으로 송금한 것이었으니, 미주·하와이·멕시코·쿠바의 동포들이 보내 주는 후원금이 상하이에 답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근대적 우편 체제 덕분이었다. 해외 동포들의 후원금이 머나먼 바다를 건너 도착한 곳이 바로 상하이우정총국이었다. 당시 우정총국은 공공조계에 있었기 때문에 후원금을 수령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김구가 직접 수령할 수는 없었고, 대리인을 파견하여 찾아야 했다. 임시정부 초기에는 피치 목사가 수령해서 독립운동가들에게 전달한 사실도 있다. 이 상하이우정총국을 통해 들어온 자금으로 김구는 이봉창·윤봉길의 의거를 기획하여 성사시킬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임시정부도 활로를 찾을 수 있었다.
---「상하이(2)-상하이우정총국과 쇼킨은행」중에서

1925년 쑹스뱌오는 가족과 함께 귀국하여 국민당 정부의 병공兵工관계 일에 참여하였다. 특히 1932년 1월 28일 상하이사변 직후, 그는 상하이병공창장으로서 반일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의 휘하에 있는 병기주임 왕웅(김홍일)은 19로군 차이팅카이 부대의 후방 정보국장도 맡고 있어서 일본군 동향도 잘 알고 있었다. 당시 일본총영사관과 가까운 쑤저우허와 황푸강 합수지점에 일본 해군의 기함인 이즈모호가 정박하고 있었는데, 매일 오전 11시 시라카와 요시노리 일본군 대장과 고급장교들이 선상 회의를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쑹스뱌오와 왕웅은 폐기된 수뢰 껍데기를 부뢰로 개조하여 2월 12일 잠수부를 통해 이즈모호를 폭파시키고자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쑹스뱌오와 왕웅은 이처럼 반일 연대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이런 인연으로 쑹스뱌오의 상하이병공창은 이봉창 의거에도 수류탄을 제공하였고, 윤봉길 의거에는 20여 차례 시험을 하며 정성껏 물통과 도시락 모양의 폭탄을 만들어 왕웅 주소지로 배달하였던 것이다.
---「상하이(2)-김구와 쑹스뱌오의 한중폭탄연대」중에서

1932년 피치 부부와 김구의 운명적 인연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중요한 것은 한국 독립운동에는 단순히 한국인들만의 반일투쟁이 아니라 비슷한 처지의 중국인은 물론, 미국인 등 서양인들과도 같이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가 분명히 있었다는 점이다. 인간의 자유, 생명에 대한 존중, 민족을 넘어서는 인류애 등 약소국의 민족운동은 이러한 보편적인 토대와 결합되어야만 세계사적 의미가 있고, 또한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상하이(2)-생사기로에서의 국제연대」중에서

김구의 자싱 생활은 한 중국인 가족이 물심양면으로 그를 도왔기 때문에 가능했다. 윤봉길 의거가 일어나자 중국인 사회에서 한국 독립운동에 관한 동정 여론이 일어났다. 게다가 김구가 사건의 전모를 밝히는 성명을 발표하자 중국 신문들은 그를 ‘조선 혁명의 수령’으로 일컬었다. 이런 정황에서 국민당 정부도 김구의 신변에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 당시 장쑤성 주석으로 있던 천궈푸는 부하 샤오정에게 김구와 관련 인물들이 상하이를 탈출할 수 있도록 하고 이후에 필요한 것들을 해결해 주도록 지시했다. 한국 측에서는 중국 국민당 정부와 관계를 맺고 있던 박찬익이 김구와 임시정부 요인들의 피난을 위한 교섭에 나섰다.
---「자싱·하이옌·항저우-자싱, 메이완가」중에서

김구는 이처럼 난징의 친화이허 화이칭교에서 주아이바오와 동거하면서, 한편으로는 일제의 혹심한 공중폭격 아래서 생사를 같이하였고, 한편으로는 장제스를 만나는 등 독립운동을 영도하였다. 자싱에서 시작하여 난징으로 근 5년을 주아이바오와 같이 살고 난 이후인 1937년 여름, 일제의 대륙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김구와 임시정부도 중국의 국민정부를 따라 난징을 떠나 유랑의 길에 올랐다.
---「난징·전장-친화이허 화이칭교」중에서

김구를 비롯한 한인 독립운동가들이 이 시기 치루를 방문하였다. 그들은 장제스와 만나 재중 한인 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고 한중연합항일 방안을 모색하며 의견을 나누었다. 중일전쟁 개시 이전 장제스는 비록 국내 정치의 안정을 당면 과제로 삼고 공산당 토벌에 주력하면서 항일에 소극적이었지만 한인 독립운동가들을 초청하여 의견을 나누면서 지원을 약속하고 협력 방향을 논의하였다. 당시 한인 독립운동 지도자 중 첫 번째 방문자는 김구였다.
---「난징·전장-치루와 중앙판뎬」중에서

신해혁명 이후 쑨원은 군벌과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국민혁명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1924년 1월 국공합작을 추진하였다. 이와 함께 북벌을 실행할 군 인재를 배양하고자 광저우에 황푸군관학교(원명 중국 국민당육군군관학교)를 설립하였다. 황푸군관학교는 약소민족의 연합과 민족해방운동의 지원을 제창한 쑨원의 뜻에 따라 한인 청년들의 입학을 격려·우대하였다. 재중 한인 독립운동가와 단체들 또한 독립 투사와 인재 양성을 위해 그 기회를 적극 활용하였다. 황푸군관학교의 한인 입학은 1925년 7월에 입학한 3기생부터 시작하여 이후 6기까지 총 43명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1927년 말 황푸군관학교 우한분교에는 200여 명의 한인이 재학 중이었다고 한다(한. 상도, 1994, 163~166쪽)
---「난징·전장-한인애국단과 중양육군군관학교」중에서

김구가 장제스와 면담하고 중양육군군관학교 뤄양분교 한인훈련반 입교생을 모집하는 과정에서 김구의 거처와 활동의 중심이 난징으로 옮겨졌다. 이후 김구가 난징에서 전개하는 모든 활동의 조직적 기반은 한인애국단이었다. 한인애국단은 일본 군정요인과 친일파에 대한 암살 임무 외에도 비밀리 중국국민당 중앙조직부와 협력하여 대일 정보 수집 공작을 진행하였다. 동시에 김구가 중국국민당과의 교섭을 진행하거나 대외 활동을 벌이는 데 있어서 한인애국단이 공식적인 단체로서 언급되었다. 실제로 김구가 난징에서 운영한 조직과 단체에 대한 실무는 안공근 등 한인애국단의 간부들이 담당하고 있었다. 난징 지역 초기 한인애국단 간부로는 안공근·안경근·노태연·오면직·노종균·이마석 6인이 있었다. 이들 중 이마석을 제외한 나머지 5인은 모두 김구와 같은 황해도 출신으로 일찍이 상하이에서 장기간 특무 활동에 종사했던 인물들이다
---「난징·전장-한인애국단과 중양육군군관학교」중에서

1935년 1월 조선총독부 파견 상하이 사무관 나카노가 밀정 오대근을 시켜 김구 암살을 시도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오대근은 난징에 도착한 후 특별공작원 7명을 만났는데 그들은 암살 임무를 수행하기 전 전원이 중국 관헌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김구 암살 공작은 그 이후에도 다시 한 차례 시도되었다. 즉 조선총독부에서 나카노의 후임으로 파견된 히토스기 도헤이 사무관이 1935년 8월에서 11월 사이에 밀정 임영창을 통해 김구 암살을 실행하고자 했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다(윤대원, 2018). 『백범일지』에도 이와 관련한 언급이 보인다. 김구가 11월 초 자싱에 가서 임시의정원 회의에 참여한 후 난징으로 돌아왔는데 난징 경비사령관 구정룬이 김구에게 일본이 고액의 현상금을 걸고 체포를 교섭해 왔으니 조심하라고 하였다. “또 사복 입은 경관 일곱이 푸쯔먀오 부근으로 돌아다니더라는 말도 들었다”고 한 것은 이때의 암살 시도와 관련이 있다. 이렇듯 계속되는 일본 측의 암살 공작 속에서 김구는 활동상의 안전과 편의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에 이전에 자싱에서 뱃사공으로 자신을 도왔던 주아이바오를 데려와 난징 푸쯔먀오 구역에 있는 화이칭교 부근에 거주하면서 고물상 부부로 위장하였다.
---「장닝-김구의 은신처」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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